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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신구가 심는 예술적 씨앗, 청년의 무대를 깨우다 [무대를 잇다①]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5.12 13:29
수정 2026.05.12 13:30

신구·박근형의 60년 내공, 출연료 기탁으로 틔운 ‘연극내일기금’

오디션에서 실제 무대까지, ‘베니스의 상인’으로 맺은 첫 번째 결실

“연극은 사람의 일이고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 표현은 반드시 정직해야 합니다. 그걸 놓치면 다 허사가 되는 겁니다.”


지난 4월,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연습실에서 청년 배우들의 시연을 지켜본 원로 배우 신구(90)의 이 일침은 단순한 연기 지도를 넘어선 무게를 지닌다. 예술적 정직함이 생존의 논리에 밀려나기 쉬운 한국 연극계의 척박한 현실을 거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 순간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본질인 정직한 표현이 행정적 요건이나 일회성 성과보다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에서, 신구의 발언은 기금의 존재 이유가 단순한 재정적 지원을 넘어 예술적 가치의 복원에 있음을 시사한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신구가 이 자리에 선 배경에는 그와 동료 배우 박근형(86)이 직접 씨앗을 뿌린 ‘연극내일기금’이 있다. 연극내일기금은 평생 무대를 지켜온 두 원로 배우가 출연료와 공연 수익을 기탁해 조성한 민간 기금으로, 공적 안전망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청년 예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마련됐다. 표면적으로는 훈훈한 미담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지원금 수령을 위한 지표 맞추기에 매몰되어 자생력을 잃어가는 한국 공연예술계의 만성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장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 기금의 재원은 2023년 12월 초연된 신구·박근형 주연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비롯됐다. 해당 작품은 2024년 앙코르 공연과 전국 21개 도시 투어를 거치며 총 102회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박근형은 관객들이 보내준 성원을 업계에 환원하기 위해 2025년 5월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별도의 기부 공연을 단행했다. 이 공연에서 두 배우는 출연료 전액을 무상으로 기부했고, 티켓 수익 전액과 공연 관계자 및 동료 배우들의 자발적 기탁금이 더해져 기금이 마련됐다. 신구는 당시 “이 무대가 청년 연극인을 위한 창작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는 소회를 밝혔다.


기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와 협력해 ‘연극내일 프로젝트’ 설계와 운영비로 투입됐다. 2025년 12월 진행된 온라인 공모에는 만 24세에서 39세 사이의 청년 및 신진 연극배우 약 1000명이 몰려 3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류 심사와 대면 오디션을 거쳐 최종 선발된 안승균, 김양균, 류지오 등 30명의 배우는 합숙형 연극캠프 방식의 커리큘럼을 이수했다. 워크숍, 배우 훈련, 마스터클래스 과정을 거쳐 최종 작품 발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관리됐다.


특히 신진 예술인 육성 플랫폼 ‘프로젝트 3일’ 소속의 청년 연출가, 작가, 프로듀서들이 기획 전반에 참여해 프로젝트의 현장성을 높였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특징은 거장들이 직접 연습실을 방문해 청년 배우들의 장면 시연을 참관하고 격려하는 ‘현장 동행’에 있다. 이는 공공 지원 제도가 흔히 취하는 사후 정산 기반의 현금 지급 방식과 차별화된다.


신구는 연습실 방문 당시 “제가 6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감회”라며 청년 세대와의 정서적 교감을 강조했다. 박근형 역시 “빛이 없어서 헤매던 우리 때에 비하면 지금은 갈 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적”이라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두 거장은 1962년 ‘소’와 1958년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로 각각 데뷔했던 시절을 회고하며, 현재의 청년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연극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무대에 오른 작품은 청춘의 생존과 해방을 다룬 ‘탠덤: Tandem’, 권력을 탐구한 ‘여왕의 탄생’, 인간의 연대와 희망을 담은 ‘피르다우스’ 등 총 3편이다. 지난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아르코꿈밭극장에서 상연한 이 작품들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시장의 관심을 증명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배우 안승균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 작업은 결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서로 질문하고 부딪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큰 배움이자 행복이었다”고, 김양균은 “이번 작업을 계기로 왜 연극이어야 하는지, 동료들과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 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됐다. 그 과정이 배우로서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또 류지오는 “같은 꿈을 바라보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뜻 깊었다”며 “결국 연극은 사람과 함께 부딪치며 만들어가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번 프로젝트는 일회성 수혜의 함정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 프로 무대로의 ‘고용 연결’을 실천하고 있다. 해당 기금을 기반으로 한 ‘연극 내일 프로젝트 오디션’을 통해 신구와 박근형이 출연하는 연극 ‘베니스의 상인’(오경택 연출, 7월 8일~8월 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오디션 기회가 제공됐고, 박승재, 엄현수, 김윤지, 이준일, 주홍이 앙상블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박근형은 “연극내일기금이 벌써 4개월이 됐고 이제 작은 열매를 맺는다”며 “7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상연될 ‘베니스의 상인’ 공연이 흥행할 경우 추가 기부 공연을 통해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병국 아르코 위원장은 “두 세대 차이가 나는 배우들이 연극이라는 끈으로 연결되는 자리”라며, 티켓 수익을 다시 기금으로 적립하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겠다고 강조했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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