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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한복판에서, 여성은 이미 평화를 살고 있었다

박영민 기자 (parkym@dailian.co.kr)
입력 2026.04.15 14:06
수정 2026.04.15 14:07

㈔세계여성평화그룹(IWPG)이 지난 3월 17일 유엔 인근 처치센터(CCUN)에서 국제여성리더네트워크(INLW), 튀르키예 그린크레센트와 공동으로 개최한 NGO 포럼에서 이경미 전략팀장이 발언하고 있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2026년 3월, 뉴욕의 봄은 아직 차가웠다. 유엔 본부 유리창 너머로 이스트 강이 흘렀고, 그 강 건너편 세계에서는 포성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참호, 가자지구의 폐허, 미얀마의 정글, 수단의 난민 행렬. 평화라는 단어가 공허하게 들리는 시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전쟁을 몸으로 통과한 여성들이 입을 열었다.


총성보다 오래 남는 것

제70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70)는 해마다 반복되는 외교적 의례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의 현장은 달랐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이 주최한 사이드 이벤트 '평화의 리더로서의 여성: 분쟁영향지역에서의 회복력과 변화'에서, 발언자들은 통계와 권고문 대신 자신이 살아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예멘에서 온 여성은 말했다. 폭격이 이웃을 앗아간 날 밤, 자신이 한 일은 무기를 드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다고. 남겨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것이 평화의 시작이었다고.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아체, 남수단, 미얀마. 분쟁의 언어는 달랐지만 여성들의 증언은 일관된 궤적을 그렸다.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 주체성을 되찾고, 폭력의 언어를 거부한 채 비폭력과 성찰의 방식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운 이야기들이다. 이 여성들은 피해의 역사를 살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스로 평화의 설계자가 됐다.


총성은 결국 멈춘다. 그러나 공동체를 되살리는 일은 총성이 멈춘 뒤에도, 아니 총성이 울리는 그 순간에도 이미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일을 가장 먼저, 가장 끈질기게 해온 것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지난 3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러너홀에서 '차세대 여성 리더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평화 토크'를 개최하고 있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선언은 충분하지 않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25호가 채택된 것이 2000년이다. '여성·평화·안보' 의제가 국제사회의 공식 언어가 된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지금, 분쟁 지역 협상 테이블에 앉은 여성의 비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문다. 평화협정 서명자 중 여성이 포함된 경우는 예외에 속한다.


선언의 역사는 길었다. 그러나 현실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IWPG는 이 간극 앞에서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하면 여성을 평화 프로세스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가 아니라, 여성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평화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번 CSW70에서 공식 소개된 글로벌 캠페인 'PLACE(Peace as Lived And Connected Experience)'는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일상 속에서 조용히 이뤄져 온 평화의 실천들을 기록하고 연결해 개인의 경험이 정책과 사회적 흐름으로 확장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작은 것들이 축적될 때, 역사가 바뀐다. 그것은 낭만적인 믿음이 아니라,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해온 사실이다.


이경미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본부 전략팀장이 제70차 유엔 CSW 진행 기간에 만난 '튀르키예 여성과 민주주의 협회(KADEM)'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평화는 '이후'가 아니라 '지금'이다

이번 CSW70에서 IWPG는 20여 개국 정부 관계자와 협력을 논의하고, 50여 개 NGO와 파트너십 협의를 진행했다. 일부 국가는 IWPG의 여성평화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도입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방에 흐르던 공기였다. 지쳐 있지만 포기하지 않은, 냉소를 넘어선 절박한 연대감이다.


우리는 종종 평화를 '전쟁이 끝난 다음'의 상태로 상상한다. 그러나 현장의 여성들은 이미 다른 언어로 평화를 살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 적이라 불리는 이웃과 밥을 나누는 것, 무너진 학교 자리에 다시 모이는 것. 그것이 평화다. 추상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평화, 선언이 아니라 관계로서의 평화다.


국제사회가 유엔의 권위를 시험하고, 다자주의의 토대가 흔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결의문보다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서 평화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정책의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 그것이 지금 국제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뉴욕의 봄은 더디게 왔다. 그러나 유엔 회의장 안, 분쟁을 살아낸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다음 계절을 말하고 있었다.


평화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만들어가고 있다.


[도움말: 이경미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본부 전략팀장]

박영민 기자 (parky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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