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16년 만에 정권 교체…‘유럽의 트럼프’ 오르반 퇴장
입력 2026.04.13 21:06
수정 2026.04.13 21:06
12일(현지시간) 실시된 헝가리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 티서당의 머저르 페테르 대표가 헝가리 국기를 흔들고 있다. ⓒ AFP/연합뉴스
12일(현지시간) 실시된 헝가리 총선에서 야당인 티서당이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2010년 집권 이후 '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며 러시아와 각별하게 밀착해온 오르반 빅토르 총리의 16년 장기 집권이 막을 내렸다.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헝가리 국가선거위원회는 이날 총선 개표 결과(개표율 97.74% 기준) 머저르 페테르 대표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티서당이 전체 199석 중 138석을 확보했다. 개헌 요건(133석)을 갖춘 의석 수다. 반면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피데스당은 5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지난 2022년 선거에서 54.1% 득표율로 135석을 얻었던 것과 비교한 참패를 당한 것이다.
5회 연속 집권에 도전했던 오르반 총리는 부패 청산, 공공 서비스 정상화, EU와의 관계 회복을 기치로 내건 머저르 대표의 돌풍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오르반 총리는 오후 9시 25분쯤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결과지만 앞으로는 야당으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머저르 대표의 승리를 축하했다. 오르반 총리가 패배 시 불복할 것이란 일각의 예상을 깨고 일찌감치 결과에 승복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법학을 전공한 머저르 대표는 오르반 총리의 피데스당에서 20년 넘게 몸담아온 당내 중견 인사다. 브뤼셀 외교관과 국가기관 고위직 등을 거쳤으며, 피데스 핵심 인사 바르가 유디트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 그의 인생 전환점은 2024년에 찾아왔다.
아동보호시설 내 성학대 은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이 사면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형 정치 스캔들이 터졌다. 그는 이를 계기로 피데스당과 결별하고 신생 정치운동 티서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티서당은 헝가리 내 득표율 30%를 기록하며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머저르 대표 돌풍의 핵심 동력은 반부패 정서였다. 유럽연합(EU)은 오르반 정부가 EU 기금 수십억 유로를 유용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 대한 개발기금 집행을 오랫동안 보류해왔다. 머저르 대표는 EU와의 관계 정상화와 기금 수령 재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경제 문제도 주요 변수였다. 헝가리의 저성장과 낙후된 의료 시스템에 대한 국민 불만이 누적돼 있었고, 머저르는 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야당이 압승하자 헝가리 다뉴브강 인근에서 야당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오르반 총리 지지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부다페스트 시내 곳곳에선 정권 교체를 반기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총선 투표율은 투표 마감 30분 전을 기준으로 77.8%로 잠정 집계됐다. 역대 최대치인 2002년 70.5%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오르반 총리를 전폭 지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오르반 총리의 낙마를 바라던 유럽연합(EU)은 희비가 엇갈렸다.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을 "점령하겠다"고 공언해 온 오르반 총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156조원) 규모의 대출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EU의 주요 법안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사사건건 EU와 갈등을 빚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2019년 5월13일 미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AP/뉴시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소셜미디어(SNS) 엑스(X·옛 트위터)에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EU는 더 강해지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헝가리 국민이 EU의 가치와 유럽에서 헝가리 역할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승리”라고 축하했다.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EU와 사사건건 대립해왔던 헝가리의 정책 노선에도 변화가 전망된다. EU는 기금 운용의 투명성을 담보할 사법 독립성과 법치주의 등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년간 헝가리에 배정된 지원금을 동결해 왔는데, 시장에서는 야당 집권으로 동결 자금이 풀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유로화도 도입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헝가리에 발목이 잡혔던 EU의 우크라이나 지원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