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가 빚은 강‘호세’, 김기영 영화들 속 ‘동식’과 달랐다 [홍종선의 캐릭터탐구㊾]
입력 2023.10.17 08:13
수정 2024.02.06 14:49
등장인물 비교해 보니…영화 속 영화 ‘거미집’ VS ‘하녀’ ‘화녀’ ‘충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거미집’(제작 앤솔로지스튜디오, 공동제작 바른손스튜디오·루스이소니도스, 배급 ㈜바른손이앤에이) 안에서, 감독 김열(송강호 분)이 연출하는 영화 ‘거미집’은 마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로 시작해 ‘화녀’(1971)를 거쳐 ‘충녀’(1972)로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자연스레,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등장인물과 김기영 감독 영화들의 등장인물을 비교하며 보게 된다. 기본 인물관계도는 남자(오정세가 맡은 바람기 많은 톱스타 강호세가 연기한 인물), 남자의 본처(임수정이 맡은 베테랑 배우 이민자가 연기한 인물), 남자의 애첩(정수정이 맡은 떠오르는 신인배우 한유림이 연기한 인물). 남자의 어머니(박정수가 맡은 돈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오 여사가 연기한 인물), 남자의 아버지(김재건이 맡은 노배우가 연기한 인물로 외도하다 아내에게 거세당해 혼수상태로 침대에 누워지낸다)가 등장한다.
우선, 남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못 보던 인물이다. ‘충녀’ 김동식(남궁원 분, 극중극 ‘거미집’의 남자 역할)의 성불구 특성이 아버지에게로 옮겨졌다. 동식은 잘나가는 아내(전계현 분)에게 기죽어 고개를 숙였지만, ‘거미집’ 아버지는 외도했다가 아내에 의해 물리적으로 불구가 됐다. 남자의 어머니는 이후 집안을 장악하고 아들의 애정사에까지 간섭하는 가부장으로 군림한다.
본처는 앞서 촬영된 극중극 ‘거미집’ 원안에서는 ‘하녀’에서 주증녀가 연기한 부인처럼 내조형 전업주부였지만. 김열 감독의 강력한 열망으로 수정된 캐릭터로는 ‘화녀’와 ‘충녀’에서 전계현이 연기한 본부인처럼 유능하고 당당한 사업가다. 다만 본처가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에서는 첩을 상대로 모략을 꾸미는데, 재촬영 중인 ‘거미집’에서는 신여성답게 보다 큰 그림 아래 남편 집안을 향해 30년간 갈고닦은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애첩은 남자가 합창을 가르치는 공장의 공원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하녀’와 같지만, ‘하녀’나 ‘화녀’처럼 남자네 집 하녀는 아니다. ‘하녀’에서 김동식(김진규 분)은 생계를 위해 남의 공장에서 음악 수업을 하지만, 극중극 ‘거미집’에서는 남자의 집안이 운영하는 공장이다. 오히려, 본부인으로부터 그 관계를 인정받고 남자와 동침한다는 점에서는 윤여정이 연기한 ‘충녀’의 명자와 같다. 여공에서 사장님댁 작은마님이 된 일종의 신데렐라다.
‘거미집’의 애첩은 김기영 감독 영화들의 그녀들에 비해 한결 해맑고 착하다. 단지, 그림 같은 얼굴로 투정이 많을 뿐이다. 이은심이 연기한 ‘하녀’의 그녀처럼 쥐를 때려잡기는커녕 거미를 무서워하고. ‘하녀’의 하녀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내기보다는, 윤여정이 연기한 ‘화녀’의 명자처럼 상큼하고 ‘충녀’의 명자처럼 패션 감각이 좋다. ‘하녀’나 ‘화녀’의 하녀처럼 남자네 가족을 독살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되레 ‘복수의 화신’이 된 본처와 동맹을 맺고 남자를 향해 복수한다.
이 모든 파란의 중심에 남자, 호세(극중 배우 강호세가 연기한 인물의 이름도 호세)가 있다. 호세는 집안이 소유한 재봉공장에서 피아노 치며 노래를 가르칠 뿐 운영은 아내가 도맡아 하는 한량이다. 한량답게 바람기와 이기적 낭만이 있고, 부모는 물론이고 버젓이 1층에 아내가 있는 집 2층에 정을 나눈 공장직원 유림(극중 배우 한유림이 연기한 인물명도 유림)을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튼다. 공장 음악교사인 것은 ‘하녀’의 동식(김진규 분)과 같고, 아내를 두고 당당히 내연녀와 살림을 차리는 것은 ‘충녀’의 동식(남궁원 분)과 같은데, 보면 볼수록 호세는 그들과 결이 다르다.
보는 내내 궁금증이 일었다, 왜일까. ‘하녀’의 동식은 공장직원이 자신의 집 하녀가 된 뒤,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 첩으로 들이게 됐는데 ‘거미집’ 남자는 정부터 통한 뒤 집에 들여서일까. 작곡가인 ‘화녀’의 동식(남궁원 분)도 하녀 명자(윤여정 분)를 자신의 애인인 가수 지망생으로 오해해 관계를 맺은 후 부인과 대등한 대접을 요구하는 하녀에게 끌려다녔는데, ‘거미집’ 호세는 자신의 의지로 쌍방호의 하에 관계를 맺어서일까. ‘하녀’ ‘화녀’ ‘충녀’의 그녀들은 한결같이 동식에게 목을 맸는데, 호세는 되레 유림에게 뒤통수를 맞아서일까.
시대상이 변함에 따라 본처든 첩이든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여성 캐릭터들은 한층 주체적으로 변모했다. 마찬가지로 호세 역시 집안에서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가장은 아니고, 적어도 유림에 대해서는 일방성을 탈피해 좀 더 부드럽고 나긋해졌다. 근데, 그것만일까.
해답은 배우 오정세에게 들을 수 있었다. 오정세는 영화 ‘거미집’ 관련 언론 인터뷰에서 귀가 번쩍 트는 얘기를 꺼냈다.
“예전 분들(배우 김진규와 남궁원이 표현한 ‘동식’들)을 많이 가져오진 않았어요. 호세를 그리는 스타트(시작점)는 김열 감독이 걸작을 만드는 과정에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인물이었어요. 어떤 걸림돌이냐, (극중극 안팎에서) 두 사람을 사랑하는 바람피우는 사람. 비호감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 아니다. 하, 저 자식 때문에 답답함, 불편함의 걸림돌이 되는 게 맞다. 단정적 비호감 인물보다는 지금의 호세처럼 오정세도 ‘어떻게 가나,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점만 정하고 출발해 봤어요. 열린 마음의 호세가 이 영화 톤에 맞다, 미워 보일까 그렇다가도 좀 다르게 보이는, 지금의 ‘호세의 결’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쪽으로 가게 됐습니다.”
결말만 바꾸면, 단 이틀만 추가 촬영하면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이 걸작이 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연출 엔진에 불을 붙인 감독 김열인데. 하필 ‘거미집’의 남자 주인공을 맡은 톱스타 배우 강호세는 영화보다 상대 여자주인공 역의 배우 한유림에게 빠져 있다. 유부남인데, 아내(염혜란 분)를 아끼지 않는 것도 아닌데 함께 연기한 신인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잘나가게 된 한유림의 태도가 어딘가 달라졌다. 강호세는 애가 탄다. 극중극 ‘거미집’, 걸작 탄생의 1차 걸림돌이다.
그런 강호세가 출연한 극중극 ‘거미집’에서도 호세는 두 사람을 사랑한다. 부인이 싫어서 바람피우는 게 아니고 부인 민자도, 애인 유림도 사랑한다. 둘 다 가지려 한다. 이보다 이기적이기 힘든데, 우유부단함에 속이 답답하고 불편해 마땅한데, 과거 영화들 속 동식보다 적어도 진심으로 보여 인간적이다. ‘동식’들은 사랑으로 상대와 관계한 적이 없다. 유혹에 넘어간 불장난(하녀)이거나 겁탈(화녀)이었고, ‘충녀’의 동식은 ‘필요’라는 단어를 반겼다.
‘충녀’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호스티스로 내몰린 명자가 동식과 첫 밤을 보낸 뒤 “전 남자라는 걸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제 사장님을 꼭 필요로 하고, 사장님은 (성적문제 해소를 위해) 절대 제가 필요하다 하셨으니 서로 살아야 돼요”라며 자신을 첩으로 들여달라고 청한다. 이에 동식은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한발 물러섰다가 “좋았어. 싸구려 사랑보다 그게(필요가) 보증수표다”라며 동거에 동의했다.
오정세는 달랐다, ‘사랑’을 말했다. 열린 마음의 호세, 다르게 말하면 자유 영혼인 호세가 주변인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은 자명하나, 적어도 호세의 마음은 진심이라는 얘기다.
“본인은 둘 다 사랑인 걸로 생각하고 호세에 접근했어요.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호세가 영화적으로 혼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큰 응징이 아니라 소소한, 영화적인, ‘거미집’ 톤에 맞는 혼남이요. 영화 속 영화에서 실제로 그런 장면이 나와요. 두 수정 배우(임수정, 정수정)가 격투신, 액션신을 할 때 죽어서 바닥에 누워 있는 호세가 (금두꺼비에) 맞잖아요. 저 둘의 싸움의 피해자가 호세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지운) 감독님께 말씀드린 적도 있는데 그렇게 된 거죠. 귀여운, 한 번의 ‘얘 이눔의 새끼’, 죽어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때려 주는 혼남이 좋았습니다. 영화 속 현실의 강호세도 (혼남이) 있어요. 마지막에 새롭게 완성된 ‘거미집’을 시사회에서 보면서, 걸작을 보면서, ‘큰 뉘우침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혀’는 아니고 ‘아주 찰나의 뉘우침’ 같은 느낌이 있었으면 했어요. 작품 ‘거미집’을 보면서가 아니라 은막 속 자신을 보면서 조금 눈물 흘리는 (정도요).”
실제로 극장 객석의 배우 강호세 곁에는 걸작 시사회에 참석해 기분 좋고 남편이 자랑스러운 부인(염혜란 분)이 자리해 있다. 부인을 곁에 둔 채 떠나간 연인을 스크린에서 보며, 또 두 여인을 사랑하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은 호세를 보며 살짝 눈물짓는 강호세. 그 반성에는 두 여인을 향한 마음이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 강호세보다는 영화적으로나마 응징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오정세가 보인다. 배우 오정세가 강호세에게 다가가 호세를 연기했다면, 호세를 오정세에게로 끌어와 찰나의 회한을 표현한 순간이다.
아직 ‘배우 오정세의 호세 되기’에 대한 답이 끝나지 않았다. 사실 다 전할 수 없지만, 오정세는 매 질문에 대하여 진솔하고도 깊이 있게 답했다. 오정세의 ‘호세 레시피’에 관한 답의 뒷부분을 마저 소개한다.
“연극 ‘라이어’가 지금 관객들에게는 바람피우는 사람의 끊임없는 거짓말, 어떤 애드리브나 상황 추가되고 추가되어 재미로 응집해 있는 공연으로 알고 계실 거예요. 제가 공연했을 때도 그랬는데, 어느 날 초연하셨던 분이 오셔서 ‘출발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거짓말에 관한 에피소드지만, 정말로 두 사람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픔을 그린 극이다.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는데 (달라졌다), 재미없어도 초연에 근본해서 했으면 좋겠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했죠. 그래서 (절규하듯) ‘가지 마’,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 아픔을 연습했어요. 그때의 기억과 연습이 이번 호세에 도움이 됐어요, 그러면서 호세를 좀 잡아갔습니다.”
인터뷰에 자리한 모든 기자의 눈에서 ‘이해’의 빛이 나올 때까지, 오정세는 호세 연기의 시작점에서 설명을 시작해 과거의 연극 연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참, 정성스럽다. 질문한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보았다. 별도의 기사로 ‘정성 화법’의 인터뷰를 소개할 것을 약속한다.
그 전에,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오디션에 떨어지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편집되고, ‘하울링’도 오디션 탈락해 드디어 네 번째 도전 만에 배우 송강호와 연기하게 됐다며 함박웃음을 짓던 배우 오정세의 ‘거미집’, 정세가 표현한 오세를 극장에서 만나보면 어떨까. 추후 OTT로 봐도 좋지만, 작은 화면으로 보기엔 아까운 디테일 연기이고 색감 좋은 미장센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