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지원’으로 저장된 한국영화 명장면 TOP5 [홍종선의 명대사㊾]
입력 2023.10.15 12:42
수정 2023.10.15 12:42
‘초록물고기’(1997)부터 ‘내부자들’(2015) 명장면, 그대사
한 편의 영화를 기억하고 저장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작품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3년 전, ‘올드무비’ 코너에서 영화는 종종 정지된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될 때가 많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 장면은 마치 사진처럼 마음속에 저장돼 있고, 어쩌면 그 장면은 인상적 한 컷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대변하고 응축하는 기억 그대로다’라고. 사실, 관객에게 잊히지 않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단 한 장면이라도, 정지된 화면을 넘어 소리와 동작까지 입혀져 영상으로 기억된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 세상에 나온 영화 수 대비 그 확률이 얼마라고 수치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건 가늠이 된다. 기사를 쓰기 전에, 우리나라 영화를 떠올려봤고,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내 마음에 저장’돼 있는지 톺아 봤다. 정말 몇 작품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아마도 영화를 본 모든 관객이 기억할 “야, 4885 너지?”. 영화 ‘추격자’(감독 나홍진, 2008)에서 엄중호(김윤석 분)가 마침내 세상을 농락하던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 분)을 꽉 막힌 한밤 골목길 차 안에 갇힌 모습으로 발견한 그때. 돌파구 마련과 기선 제압 차원에서 고개를 차 밖으로 빼 애먼 뒤쪽 차들을 향해 “야, 차 안 빼! 말 안 들려, 차 빼. 차 빼라구! 아줌마 말 안 들려. 차 빼, 차 빼라구, 차 빼!”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지영민의 말을 탁 자르며 조용히 치고 들어와 나직이 말했다.
“야, 4885 너지?”. 일순간 그 퍼릇퍼릇 날뛰던 지영민의 기세가 꺾이고,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나 고개 숙인 채 눈알 굴리던 그때, 마치 지영민으로부터 몹쓸 짓을 내가 당한 것처럼 분하고 억울하고 팽팽하게 화나던 감정이 잠시 스륵 풀렸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골목길 추격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다음 생각난 건 공교롭게도 1997년에 개봉한 영화들이었다. 먼저,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생의 마지막을 직감한 막동이(한석규 분)가 공중전화 상자에서 큰성(큰형)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그. 큰성이야? 큰성, 나야 막동이. 엄마는? (흐느끼며) 엄마, 어디 갔어? 응? 나, 나 잘 있어, 괜찮어. 큰성 전화 끊지 마, 전화 끊지 마, 전화 끊지 마.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그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고 하다가 쓰레빠(슬리퍼) 잃어버려 가지구 큰성이랄 형들이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쓰레바 찾으러 다녔었잖아. 그 순원이 병신은 벌에 엉덩이 쏘여까지고 엉덩이 세 개 됐다고 둘째 형이 놀리고 그랬었잖아. 큰성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아? 으으으 이이이이 히히히흐흐.”
이 대사 전체가 생각나지 않아도 우리는 “큰성이야? 큰성 나야 막동이”로 시작해 “큰성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아?” 물으며 흐느끼며 울다 인생의 비린 맛이 느껴지는 웃는 소리로 끝나던 막동의 말, 그리고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울던 한석규의 표정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제목의 뜻을 알았다. 초록물고기는 우리가 그 시절 시냇가에서 잃어버린 해맑은 동심이었구나!
또 다른 1997년 작은 ‘넘버3’(감독 송능한)이다. 이 영화에서 아직은 조연이었던 송강호가 겨우 수하 셋을 거느린 ‘불사파’ 보스 조필 역을 맡아 보여주었던, 5분 가까이 되는 연기를 많은 사람이 숨죽이며 지켜봤고 이후에는 너도나도 흉내를 낼 만큼 큰 인기를 얻은 명장면이다.
“생활비 얼마 남았나? [14만 원쯤 남았습니다. 저희가 막노동이라도 뛰겠습니다, 형님] 건달을 불한당이라고도 한다. 불한당(不汗黨), 아니 불 땀 한…. (조직원들이 교주와도 같은 조필의 말을 받아적기 위해 수첩을 꺼낸다) 땀을 안 흘린다는 뜻이야.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조만간 일거리가 들어오겠지. 자, 결산하자.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헝그리정신에 관해서야, 헝그리. 배가 고프다는 뜻이지, 헝그리 H U N…. 뭐, 니들 일주일째 짱깨, 컵라면만으로 이렇게 때우는 것 잘 알어. 물론 흰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겠지. 그거 참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훈련, 응. 니들 한국복싱이 왜 잘나가다가 요즘 빌빌 대는지 아나? 다 이 헝그리정신이 없기 때문이야, 헝그리정신. 옛날엔 말야, 다 라면만 먹고도 진짜 라면만 먹구두,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 홍수환, ‘엄마 챔피언 먹었다’, 다 라면. 복싱뿐만이 아니야 응, 그거 누구야. 현정화, 현정화 걔두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 세 개씩이나 따버렸어. [임춘애입니다, 형님] 나가 있어! (수하 둘이 나가고, 임춘애를 말한 조직원만 이미 무슨 일이 닥칠 듯 안다는 듯 조필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따귀를 시작으로 발차기에 이어 집기를 때려 부순다. 수하 위로 옷장에서 꺼낸 이불들을 던진다. 방망이로 이불 위로 패다 던진다. 다시 매트리스 끝에 앉은 후) 들어와! 내 말, 응, 내 말 잘 들어! 내가 하늘 색깔, 하늘 색깔이 빨간색! 그러면 그때부터 무조건 빨간색이야! (황색란을 손에 들고) 요요요 이건 노리끼리한 색이지만 내가 이걸 빨간색 이러면, 이것도 빨간색이야! (달걀을 이불 쪽으로 던지며) 어, 십새끼야. 내가 현정화 그러면 무조건 현정화야! 내 말 토도토도 토토토 토다는 새끼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직사’시켜 버리겠어, ‘직사’. 암튼! 아아, 음, 그, 그 (할말을 잊은 분을 못 이겨 이불 속 부하를 다시 차며) 십새끼야. 너 때문에 까먹었잖아. 십새끼야! [헝그리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헝그리정신. 이 헝그리정신이 우리 건달에겐 필요해. 어, 니들 조만간 정말 잘나갈 거야! 정말 벤츠 타고, 벤츠 타구. 룸싸롱, 룸싸롱? 룸싸롱, 안방 드나들 듯,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들 거야, 정말이야! 응, 그때두, 지금 이 짜, 짱깨 먹던 시절! 커 컵라면 먹던 시절! 우리 산에서 뱀 잡아먹고 깨구리 잡아먹구 그런 시절! 절대 잊어선, 절대 잊어선 안 돼. 어, 절대 잊어선 안 돼! 아, 으, 모든 걸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해야 돼. 내가 늘 강조하지만, 잠자는 개한테는 결코 햇빛은 비추지 않아! 햇빛!!”
의뢰받은 도강파 보스를 강도식(안석환 분) 제거에 실패한 후 도피, 산속 지옥 훈련을 통해 조직 재건을 도모하는 가난한 폭력조직의 보스 조필. 밥 한 끼 제대로 먹이지 못하면서도 본인 말에 토 다는 하극상은 용납하지 않는 폭력적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땀 흘리는 노동은 시키지 않겠다는 배려 아닌 개똥철학으로 정신적 가스라이팅마저 성공한 상태. 굳건한 결속력이라고 판단한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았을 뿐인데 ‘기회는 이때다’ 조직원의 배고픔을 폭정으로 지우는 행동에 나선다. 채찍 후 당근보다 더하게, ‘우리는 잘나갈 것’이라는 장밋빛 비전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함에도 인기가 드높았던 건, 분을 못 이겨 말을 더듬는 송강호의 연기가 큰 재미를 주었고. 우리의 군사정권 시절 하의 공포정치를 희화화로 연상시켰고. 불한당의 한자든, 헝그리의 영어든 잘 몰라 끝을 흐리면서도 또 즉사를 직사로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너희보다는 내가 낫다’는 우월감을 나름의 고급언어를 통해 드러내는 모습이 큰 웃음을 주었다.
연이어, 영화를 봤든 못 봤든, 앞뒤 맥락을 기억하든 못 하든, 아주 많은 이들이 기억할 ‘음성 지원’ 장면이 두 가지 더 떠올랐다. 첫 번째 장면은 영상도 선명하다.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마치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와도 같은 절박한 표정과 외침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맞서 통과하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는 듯 선로에 서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설경구(김영호 역)의 모습이다.
영화 ‘박하사탕’(감독 이창동, 2000)의 엔딩. 현재의 인생이 흡족한 사람이 몇이나 되랴. 인생이 꼬이기 전으로. 꼬이기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 인생을 고쳐 쓰고 싶은 욕망에 비례해 현생에 대한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명장면이다.
두 번째는 음색 좋기로 정평 난 배우 이병헌의 음성이 생생한 장면이다. “나는 쩌기 모히또 가가지고 몰디브나 한잔 할라니까”. 영화 ‘내부자들’(감독 우민호, 2015)에서 검사 우장환(조승우 분)의 ‘정의’를 칼로 써서 사적 ‘복수’를 감행한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 분). 대통령 후보와 재벌회장, 유력지 논설주간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후, 몰디브가 있는 인도양은 아니나 그래도 물이 있는 호숫가에서 우장환에게 자신의 해외 도피를 알리며 범인 검거 등 마무리를 종용하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았던 정경언 유착 비리의 끝이, 내부 고발한 대가로 ‘모히또 한 잔’이면 족하다는 듯한 싱거운 표정과 말투가 인상 깊었다. 섬 국가 이름을 모히또로, 칵테일 이름을 몰디브로 바꿔 말한 실수가 톡 쏘는 재미를 주었고 이후 숱한 이들이 글이나 영상물의 제목에 패러디했다.
좀 더 있지만, 내 마음의 순위 TOP5 정도에서 가름한다. 팬심 돋게 한 명장면들을 톺아보다 새삼 각인된 사실이 하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명장면엔 명배우가 꼭 있다, 명배우의 해석과 표현이 시나리오의 그 장면을 명장면으로 탄생시켰다. 시간의 제약을 넘어 명장면을 남긴 이들은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민국의 영화사를 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 중이다. 저마다 선호하는 장르를 떠나 이 소중한 배우들의 작품은 기꺼이 선택해 보는 게 한국영화 역사를 이어가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있는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