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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7>] 탁발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2.08.04 10:13
수정 2022.08.04 10:13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7화 탁발


이철백은 배차과장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아마 단골집에서 매실주로 만취한 이후 회사에도 들렀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철백은 아랫배에 잔뜩 힘을 넣고 물어보았다.


“몇 시에 왔던 데요?”


“다섯 시 조금 지나 왔더라.”


“전혀 기억이 없는데요.”


“앞으로 낮에는 술 마시지 마라. 너나 나나 술 취하면 개다, 개.”


술 마시면 주사가 있는데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얻어먹기만 하는 자린고비 배차과장이 당당하게 훈계하듯 말했다. 이철백은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배차과장에게 꾸지람을 듣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살모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조양한테 돈 빌린 건 기억 나냐?”

“조양에게 돈 빌렸어요?”


“가서 직접 물어봐.”


이철백은 천천히 이층 사무실로 올라가 경리사원인 조양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돈을 빌려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철백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기에 조양이 사만 원밖에 없다고 대답했고, 그러니까 이철백이 오만 원 빌리려 했는데 오만 원이 안 되니 그냥 두라고 하더란다. 이철백은 능글맞게 비아냥거리던 배차과장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며 울화통이 터지고 목덜미가 뻐근했다.


“이 씨팔 새끼!”


별안간 터진 이철백의 욕지거리에 조양이 깜짝 놀라 토끼처럼 눈을 똥그랗게 떴다. 이철백이 문을 박차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차고지 쪽으로 달려간 이철백이 주위를 둘러보며 배차과장을 찾았지만 그는 벌써 펑크 난 기사의 택시를 몰고 나간 이후였다. 이철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어제 외상술값을 탁발하기 위해 택시 운전석에 올랐다.


이튿날 이철백은 아침까지 영업해서 외상술값을 갚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어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차고지에 택시를 반납하고 든든한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회사를 나서던 이철백은 눈알이 토끼처럼 벌건 채로 출근하던 배차과장과 딱 마주쳤다. 배차과장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철백을 가로막았다.


“너, 그저께 용천실비에도 갔다고 하더라. 어제 한잔하러 갔더니 그러더라. 많이 취해서 왔다던데 혹시 실수 안 했나 오늘 가서 한번 물어봐.”


배차과장의 말에 이철백은 어제 일까지 덩달아 생각나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도 배차과장이 이철백에게 한 말은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욕설이나 마찬가지였다. 충고나 조언이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전제되어 있고 종국에는 상대방의 성찰을 견인해 내는 건데 배차과장의 말은 그런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배차과장은 이철백 때문에 잔뜩 상한 감정을 충고와 조언이라는 형식을 빌려 분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술 먹으면 개라니, 그 얼마나 심한 악담인가. 하지만 어제만큼의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일을 복기 내지 유추해보면, 이철백이 조양에게 돈 오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배차과장에게 부탁했을 것인데 돈 빌려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자린고비 배차과장은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고 이철백도 물러서지 않고 ‘얻어먹는 것 하나는 잘 하면서 장롱에서 썩어가는 돈 좀 빌려달라는데 그걸 못 빌려 주냐, 떼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하며 배차과장을 골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배차과장은 만취한 이철백의 조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생긴 울분을 안고, ‘더러워서 일 못해먹겠다’며 일찍 퇴근해버렸을 공산이 컸다.


이철백은 용천실비 건을 거론하는 배차과장의 말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났거나 아니면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어제 술자리의 기분 그대로 안줏거리 뒷담화나 주정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철백은 가차 없이 말을 잘라버렸다.


“됐습니다. 이제 술 마신 얘기는 그만하세요. 용천실비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철백은 옥탑방으로 돌아와 통화내역을 쭉 훑어보았다. 전화를 한 기억도 없는 이름들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황영술, 노민구, 장성주 등 요즘 잘 만나지 않는 친구들은 물론 절친한 한종탁과 임봉식도 몇 차례나 목록에 있었는데 심지어 삼십 분 넘게 통화한 기록도 있었다. 특히 난감한 건 등록도 안 된 모르는 번호와 통화한 내역이었다. 그게 단골집에서 매실주를 마시면서 누군가와 통화한 것인지 아니면 배차과장이 말한 용천실비에서 통화한 것인지 이철백은 눈앞이 캄캄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그러나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자신은 배차과장과는 달리 술에 취해도 남에게 해코지를 안 한다는 점이었다.


배차과장에게는 용천실비 건을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직접 방문해서 사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냥 며칠 지나서 돈 좀 생기면 외상값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갚아주면 그만이었다. 실수를 했다한들 그걸 사과까지 하고 나설 일은 아니다 싶었다. 술 먹으면 다들 실수하게 마련이고 술장사하려면 그 정도는 아량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이철백은 믿고 있었다.


그저께 나하고 만났었나? 오후 늦게 이철백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한종탁에게 문자를 넣었다. 미끼 문자를 툭 던져놓으면 한종탁은 으레 묻지도 않은 말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는 했다. 이철백이 강태공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지만 한종탁은 기대와 달리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이철백은 한참을 기다리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에야 한종탁에게서 아주 간단한 문자 한통을 받을 수 있었다. 통화만 했고, 나는 자네더러 일찍 집에 가라 했고, 이제 나는 잠수 타야할 시간이 되었고.


잠수 탄다는 말은 술을 끊는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한종탁은 최근에 또 문학병이 도져 술을 최측근처럼 대동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한종탁은 오래 전 김석규가 지방의 작은 문예지에서 소설 신인상을 수상한 것에 자극받아 두문불출하며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이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이후 다시는 글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철백은 연례행사도 아닌 월례행사 같은 한종탁의 잠수소식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다음 문자를 열었다.


이달치 양육비 안 줄 거야!!! 이혼한 아내의 문자였다. 전처의 앙칼진 목소리와 도끼눈 박힌 얼굴이 입체영상처럼 툭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철백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법원에서 지정해 준 입금일이 벌써 일주일 전에 지나버렸다. 이철백은 내일부터 한눈팔지 말고 핸들을 잡아야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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