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6>] 낮술 광시곡
입력 2022.07.29 13:13
수정 2022.07.29 10:14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6화 낮술 광시곡
며칠 후, 이철백은 새벽 다섯 시까지 시간을 꽉 채워 택시를 운행하고 회사에 복귀했다. 마침 평소 친하게 지내는 정 기사도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정 기사가 해장국 한 그릇을 사겠다기에 이철백은 회사 정문 앞 식당으로 따라갔다. 정 기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 주인에게 막걸리 한 통을 달래서는 시원하게 한잔 들이켰다.
“알아서 마셔.”
정 기사가 자신의 빈 잔에 막걸리를 채우며 말했다.
“그럼 딱 두 잔만 마실께요.”
이철백은 얼마 전 정신병원에 입원한 김석규의 일도 일이지만 요즘처럼 영업이 안 되는 불경기에 형편이 뻔한 동료기사에게 술을 얻어 마신다는 게 미안해서 딱 두 잔으로 한정했다. 한 잔만 들기엔 아쉬웠고 석 잔을 마시려니 염치없어 보일까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드세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이철백이 정 기사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물었다. 정 기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어젯밤에 승객하고 싸웠어.”
“왜요?”
“술 취한 놈 하나 태웠는데 젊은 새끼가 말끝마다 반말에 씨팔이잖아. 그래서 젊잖게 약주 한 잔 드셨군요? 했더니 이 새끼가 하는 말이, 야이 씨팔, 니가 술 사줬냐 새끼야!”
“그걸 가만 놔뒀어요?”
이철백이 덩달아 화가 치밀어 올라 막걸리를 쭉 들이켰다. 이철백은 식당 주인이 가져온 해장국을 한 숟갈 뜨면서 정 기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장 차 세워서 끌어내렸지. 그리고 그냥 밟아버렸어. 이 새끼가 경찰 부른다 그러대. 그래서 한 번 더 밟아주고 출발해 버렸지. 끄집어 내려놓기만 하지 왜 밟기까지 했나 몰라. 좀 참았으면 되는데.”
정 기사가 회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철백을 응시했다. 이철백은 잠자코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런 경우엔 벌금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승객이 먼저 욕설하고 모욕했기 때문에 홧김에 폭행하게 되었다고 강변해도 택시기사는 서비스업이라 웬만해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택시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철백은 가타부타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정 기사가 말하는 것과 달리 속내는 후회하는 빛이 역연해 보였다. 정 기사는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 있냐?’ 하며 자조적으로 되묻고는, 후회하고 싶어도 후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책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이윽고 이철백이 말문을 열었다.
“나도 전에는 후회란 걸 안했거든요. 후회해봐야 속만 쓰리고 하니 지난 일 아예 모른 척해버리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나마 후회를 하니까 발전을 하는 계기가 되겠더라고요.”
이철백은 성찰로써 얻은 결론이라기에는 다소 애매한, 그것보단 금방 떠올랐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단편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후회란 건 그래도 반성을 전제로 하잖아요. 아니면 성찰이거나. 물론 자신을 폄훼하거나 도탄에 빠뜨리는 그런 후회는 하지 말아야죠. 그것보단 어제의 사례에서 자신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반성 내지 성찰의 후회. 그런 후회라면 백번을 해도 도움이 되는 거죠.”
이철백이 건방지게도 자신보다 십년이상 연배인 정 기사에게 훈수랍시고 늘어놓았다. 정 기사는 나이 어린 동료기사의 말을 개의치 않고 막걸리를 마시며 경청했다. 마치 라디오를 듣는 애청자의 자세처럼 다소곳했다. 정 기사의 호의적인 경청에 신이 난 이철백은 일장연설과 함께 막걸리 한 통을 혼자서 마저 비워버렸다.
정 기사와 헤어져 옥탑방으로 돌아온 이철백은 씻는 둥 마는 둥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한동안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은 점점 명료해지기만 할뿐이었다. 무릇 발동이 걸린 것이었고 명료해진 생각의 질료는 다름 아닌 술이었다. 이철백은 동료기사 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 기사는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다며 금방 택시를 몰고 모텔로 왔다.
“아직 점심때도 안됐는데?”
이철백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홍 기사가 반색하며 맞이했다.
“점심 좀 당겨 먹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사납금 맞춰놨으면 차 세우고 나랑 술이나 한잔 하자.”
“안 돼. 애기 분유 값 벌어서 가야돼.”
홍 기사가 단칼에 무질러버리고는 사무실 인근의 메기탕 집으로 택시를 몰고 갔다. 식당에서 홍 기사는 메기탕에 공깃밥을 먹고 이철백은 메기탕에 소주를 마셨다. 이철백은 다시 한 번 홍 기사에게 택시운행을 접고 술이나 마시자며 회유했고 홍 기사는 짐짓 울상을 해가며 재차 애기 분유 값을 입에 올린 다음 유유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이철백은 제대로 발동이 걸린 상태에서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골인 밥집 겸 술집이었다. 이철백은 여주인을 불러 앉히려고 그녀가 좋아하는 비싼 매실주를 당차게 주문했다. 여주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매실주를 들고 와서는 이철백의 앞자리에 앉았다. 새벽 막걸리에 점심 소주에 오후 매실주를 짬뽕으로 마셔댄 이철백은 여주인의 ‘한 병만 더?’ 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튿날 눈을 뜬 이철백은 전날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술집에서 매실주를 마시긴 했는데 도대체 몇 병을 마신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취중에 여기저기 전화질을 마구 해댄 것 같았고, 친구 한종탁이 술집에 들렀던 것도 같았다. 기억은 안개처럼 흐리거나 종잡을 수 없었고 머릿속이 깊은 바다에 침잠한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 옥탑방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마치 필름이 끊어진 듯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택시 교대시간이 이미 한참을 지나버려 이철백은 오늘하루를 젖혀버릴까 생각하다가 어제 마신 술값이 걱정되어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철백이 술 냄새를 감추려 향수 한 방울을 뿌리고 회사에 나가보니 배차과장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차고지 앞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마치 맹수 한 마리가 사냥감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철백은 어제의 음주로 에너지가 고갈되고 목소리도 잠겨 배차과장에게 대충 묵례만 했다.
“어제 술이 됐으면 집에 갈 것이지 사무실에는 왜 왔냐!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더러워서 일찍 퇴근해 버렸다!”
배차과장이 뜻밖의 공격을 가해왔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