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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인터뷰] 고두심의 3가지 갈증과 ‘빛나는 순간’…이제, 춤추게 하라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06.22 15:02
수정 2021.06.22 16:16

배우 고두심 ⓒ이하 명필름 제공

배우 고두심에게는 식을 줄 모르는 갈망들이 있다. 연기대상 7번 수상에 지상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연기력이라면 대한민국 일인자 자리에 오르고도, 하나의 드라마에 22년(전원일기 1980~2002년) 출연하고 한 회사의 인공감미료 모델을 17년 독점하며 ‘국민 엄마’에 등극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하나는 멜로 감성 연기에 대한 갈증, 다른 하나는 사람 고두심 안에 가득 채워져 있는 장난기를 그대로 드러낸 코믹 연기에 대한 희망, 또 하나는 예인으로서 본인도 어쩌지 못하게 솟아나는 끼와 흥이 어우러진 춤꾼으로서의 재능을 작품에 펼치는 꿈이다.


우선 하나는 해소됐다, 멜로 갈증. 영화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 제작 명필름·웬에버스튜디오, 배급 명필름·㈜씨네필운)을 통해서다. 1980년대 정부 정책이 만들어낸 시대상으로 에로영화가 즐비하던 시절, 고두심의 육감적 몸매에 주목하며 제기된 ‘애마 부인’ 출연 제의를 거절했던 그가 40년이 지나 제작사 명필름이 내민 손을 잡았다.


표현이 순화되긴 했으나 시나리오엔 남녀 사이 육정도 있었고, 동굴 장면에서는 배우 고두심의 표현을 빌자면 ‘남녀의 교류’도 촬영됐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 사랑에 있어 무엇이 소중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하는 ‘본질’을 만날 수 있다. 서른 살 넘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의 상처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 ‘호오~’, 위로와 치유를 전하는 깊은 사랑을 배우 고두심이 표현해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나 여자요’ 할 수 없고, 세상이 여자임을 잊고 그저 “아줌마” “어이”라고 부르는 존재로 살아온 모든 ‘진옥이’들에게 우리가 여자였음을 그리고 여전히 설레는 심장을 지니고 있음을 배우 고두심이 연기한 고진옥이 일깨운다.


지난 21일 서울 평창6길 산자락 까페에서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창문 다 열고, 마치 자연 속에서 수다 떨 듯 만난 자리에 배우 고두심은 예의 고운 피부 그대로 화장기 없이 기자들을 맞이했다.


장소부터 특별했다. 많은 이에게 힐링과 감동을 선사했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고두심이 연기한 장난희의 앙숙이자 단짝인 이영원(박원숙 분)의 집으로 촬영된 곳이었다. 당시 난희는 싸우고 시비 걸러 또 누구보다 뜨거운 우정을 나누러 영원의 집을 찾았다. 명작드라마가 촬영됐던 곳을 배우 고두심은 다시 한번 올과 결이 가지런한 영화를 들고 찾았다.


제주 의 전설적 해녀 고진옥, 서울에서 온 다큐멘터리 PD 한경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상사화처럼, 서로에게 상사병이 나는데 그 모습이 짠하게 아름답다. ⓒ

“(늙은 해녀의) 멜로에 대한 갈망, 그 지점은 파격적이지만 좋았어요.”


“시나리오 보는 순간, 여자는 끝까지 여자임을 주장하는구나! 여자는 나이가 들든 안 들든 ‘여자라는 끈’을 놓아서도 안 되고 놓을 수도 없고 놓아지지도 않는 거구나. 아무리 척박하게, 세상 저 깊은 바닥에서 고래 심줄 같은 줄 하나 잡고 사오십 년을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하면서도 여자로서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 중요하구나. 그래서 (지현우가 연기한 한경훈에게) 다가간 거예요. 흔치는 않지만, 특별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자식 같아서 사랑할 수도 있고, 육체적인 걸 갈망하겠어요. 그 사람을 들여다보니 상처가 있잖아, 내가 손을 잡아주면 치유될 것 같고. 그런 게 사랑 아닌가요, 사랑의 밑바닥엔 위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은 위로의 순간이라는, 우리 영화가 말하는 그 얘기에 공감해요. 남녀 간의 사랑도 내가 저 오빠를 만남으로써 내 편이 되어 울타리 쳐 줄 것 같고 자기 편이 되어 주니까, 치유 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겠어요. 사랑은 위로, 치유, 거기서 싹트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 고진옥은 초로의 늙은이다. 실제 고두심의 모습보다 늙게 분장시켜 놓았고 얼굴에는 주근깨와 기미가 가득하다. 평생 따가운 햇볕 아래 물질로 살아온 해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칭찬을 들을지는 몰라도 그 모습으로 멜로를, 그것도 한참 연하와의 사랑을 관객에게 설득해 내는 일은 고난이도 연기다. 흡사 칼 한 자루 쥐어 주지 않고 전쟁터에 내보내는 격이랄까. 해내기만 한다면, 세상 모든 여성이 조각 미인도 아니기에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포인트기도 하다. 모두가 드라마 ‘밀회’의 초강력 동안 오혜원(김희애 분)이 되어 이선재(유아인 분)와의 사랑을 꿈꿀 수는 없잖은가.


“어떻게 하면 그 인물에 가깝게 할까만 생각하지 (예쁘게 나와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주인공만 했던 배우, 출발이 주인공이었고 끝까지 주인공인 배우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전원일기’에서 병풍으로 너무너무 오래 했어요(웃음). 콤팩트, 종일 바르지 않는 배우로 고두심은 유명해요. 얼굴에 무슨 자신이 있겠어요.”


“행사에 화장 안 하고 가면, 박원숙 언니가 ‘그래도 배우가 화장은 하고 오는 거지, 무슨 자신감이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웃음). 자신감은 아니고요. (‘빛나는 순간’으로 돌아와) 배역에 가깝게 다가가려고 하는 거지, 딴 건 생각 안 해요. 얼굴에 깨를 칠해놓고 물에 갔다 오면 지워져서 분장사가 고생했지, 저는 고생한 거 없어요. 여기(가슴 한복판에 손을 대며)가 얘(경훈)를 향한 마음이 곱게 전달되면 사랑이지 딴 거 있나요. 나는 보는 사람이 아니고 보여주는 사람이라 몰랐을까요, 조명을 내게 몰아서라도 볼 화장을 분장사가 해준 거에 더해서라도 어떻게든 예쁘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애초 없어요.”


“그러함에도 제가 이 영화를 한 이유는 우리 영화는 해녀의 속, 내면이 강하게 그려져야 하는 작품인데 어느 배우보다 내가 제일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 감독님도 나를 놓고 썼다니까 ‘제주 하면 고두심, 고두심의 얼굴이 제주의 풍광’이라고들 하시니까 안 할 재간이 있어야죠. 그래서 했습니다.”


얼굴에 무슨 자신감이 있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고두심은 실제로 보면 얼굴이 작고 하얗고, 지성미가 있다. 동양적 쌍꺼풀에 오뚝한 콧날, 가지런한 입술 선이 예쁘다. 다만 그 외모다 연기력이 훨씬 출중할 따름이다. 장대를 가져다 스스로 조명 방향을 바꾸고 분장에 화장을 더하는 배우들은 분명 실존 인물인데 누군지는 입을 다물었다.


반백년을 우리 곁에 있었음에도 아직도 보고 싶은 연기가 많은 배우 고두심, 그를 더 알고 싶다. ⓒ

두 번째 갈증, 코믹 본능과 관련해 고두심은 최근 녹화를 마친 JTBC 예능 ‘아는 형님’에서 시작해 오래된 일화를 꺼냈다.


“(강호동이 진행하는 ‘아는 형님’에 나가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깠어요, 재미있었어요. 제가 사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놀아요. 속으로 가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소속이 있었어요. 저는 MBC, 연말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KBS, TBC 다 합해서 놀았어요. 배우만 있으니 막 노니까 어떤 후배가 ‘저 선배 팬이었는데 오늘부터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재미있게 놀았죠. 흥, 끼, 그게 있으니까 배우를 하겠죠. 그걸 누르고 얌전한 엄마 역할만 하려니 고충이 있었어요(웃음).”


“조미료 광고를 17년 했는데 그 회사 홍보 담당분이랑 드라마 많이 한 장수봉 감독은 읽더라고요, 눈에 장난기가 있다고. 나를 보여주는 작품이 오면 정말 잘할 수 있어요, 그런 기회가 올까요.”


꼭 오지요, 오게 하고 와야지요, 라고 답하고 싶다. 단순히 배우 변신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 잘할 수 있는 걸 그것도 고두심이라는 연기파 배우가 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하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사람들 끌고 콜라텍 가는 모습에서 그 장난기를 아주 조금 발견하긴 했지만 말이다.


끝으로 또 하나의 갈증. 고두심은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무용을 배웠고 배우를 꿈꿨다. 유복한 집안에서는 딸이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가기를 원치 않았고, 고두심은 서울에서 공부하는 오빠 뒷바라지를 핑계로 1970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짐을 싸서 3월 상경했다. 놀고먹을 수만은 없어서 작은 무역회사에 취업했으나, 타고난 흥과 끼를 누를 수 없어서 1972년 MBC 5기 공채에 응시했고 1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여느 공채 신인들이 그러하듯 잔심부름이나 하고 밥벌이가 되지 않자 똑순이 고두심은 다시 예전 다니던 무역회사로 돌아가 일했다. 야무진 직원이었으니 재채용이 됐을 터이고 그렇게 다시 ‘미스 고’로 지내던 그는 1974년 드라마 ‘갈대’로 친정 MBC에 복귀한다.


제대로 기회가 주어지자 고두심은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훨훨 날았다. 특히 ‘정화’에서 거상 김만덕을 차지게 소화한 것을 시작으로 제주와 떼어놓을 수 없는 대명사 ‘제주의 딸’로 자리를 굳혀 갔다. ‘제주의 딸’은 마치 영국 왕이 전 세계 각 분야 유명인들에게 수여하는 ‘작위’처럼 영광된 이름인 동시에 배우 고두심의 이미지를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로 고착시키는 역할도 했다. 예인으로서 고두심이 타고나고 무용으로 발전시킨 흥과 끼에선 점점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용, 했죠. 지금도 다 할 수 있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의 각도를 잡고 팔을 뻗어 춤사위를 선보인다, 몸에 익은 동작이다. 짧은 순간 웃음기가 가시고 카리스마가 몸에서 뿜어나온다. 날렵한 턱선과 지그시 뜬 눈에서도 보이던 빛이 생생하다. 꿈꾸던 대로 배우는 됐는데, 배우 고두심이 춤추는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에서 예인의 피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단지 예능 ‘집사부일체’에서 보고 말아버릴 춤사위는 아닌데 말이다. 배우 박인환이 열연한 ‘나빌레라’도 있었는데, 고두심이 안 될 이유가 없잖은가.


“내가 ‘나빌레라’ 같은 작품 하면 그 양반보다 더 잘할 걸요(웃음).”


장난기 가득한 사람 고두심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코믹도 좋고, 누를 수 없는 끼와 신들린 듯한 흥을 지닌 예인 고두심의 예사롭지 않은 춤사위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작품도 좋다. 꼰대 아닌 실버세대에 눈과 귀를 열기 시작한 젊은이들도 반길 영화와 드라마를 어서 보고 싶다. 우선 영매가 된 듯 한 맺힌 사람들의 역사를 피로 토해낸, 배우 고두심의 압도적 연기가 빛나는 명장면이 담긴 ‘빛나는 순간’부터 즐감!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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