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➉] 이녁 소랑햄수다, 우리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
입력 2021.06.15 16:36
수정 2021.07.01 08:02
영화 ‘채비’ 인터뷰 당시 배우 고두심이 말했다.
“고향이 제주도인데, 사투리 중에 ‘살당보민 살아진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해요.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말인데, 사람이 태어났으면 생을 다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용기와 희망을 지니고.”
‘살다 보면 살아진다’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를 영화 속에서 만나게 됐다.
“살암시민 살아지매”.
영화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 제작 명필름·웬에버스튜디오, 배급 명필름·㈜씨네필운)에서다. 영화에는 두 가지 빛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위로의 순간, 사랑의 순간. 살아가는 데 정말 큰 힘이 되는 두 가지의 ‘힘’이 이질감 없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먼저 위로의 순간. 고두심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어디 1cm도 숨을 수 없는 시선 앞에서 꾹꾹 누르며 살아왔던 해녀 고진옥의 한을 쏟아내는데…우리를 끌어안고 토닥이는 위안의 파도를 몰고 온다. 연기적으로는 압권이고, 영화적으로는 명장면인 배우 고두심의 ‘빛나는 순간’을 보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봐야 한다.
제주의 딸 고두심의 명연을 구경하려다, 고진옥의 젖먹이 시절부터 애착해 마지않는 바다에서 딸을 잃고 또 그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삶의 파노라마가 눈 앞에 펼쳐지고, 그러다 그만 내 인생도 주마등처럼 흘러 눈물을 참기 어렵다. 화면 속 고두심이 걸어 나와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다. 뜨거운 눈물은 마음을 정화 시키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텅 빈 말이자 충만한 대답, 이보다 더 삶의 깊이를 꿰뚫는 말이 있을까.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해녀이자 제주 사람들에게 ‘바람의 신’으로 사랑받는 고진옥을 촬영하러 육지 서울에서 내려온 방송국 PD 한경훈. “얼굴이 못났다”며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는 진옥에게 생긋생긋 함박웃음으로 다가서는데. 바다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고 살아서 다행이라며 눈물짓는 진옥, 객지에서 아파 누운 자신을 위해 보말죽을 끓여온 진옥,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더한 삶을 견디고 있는 진옥, 자신을 보면 볼 발그레해지는 진옥에게 어느새 맘이 기운다.
평생 사람으로 일만 하며 살아온 진옥은 여자로서 설렌다. 저승 가서 나 들어볼까 싶었던 말을 해주는 남자, 나의 고독한 인생과 거친 손마디를 따스하게 주목해 주는 경훈에게 맘을 빼앗겨 버린다. 안절부절, 가슴이 뜨거워서 잠을 이루기도 어렵다. “왜 나 같은 걸 좋대, 후회 안 해?”. 경훈은 대답 대신 묻는다, “제주도 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뭐예요?”.
왜 서른 살 넘게 차이 나는 두 사람이었어야 했을까. 영화 속 경훈의 선배 삼동(김중기 분)의 말처럼 “역겹다” 소리를 살 수 있는데. 전쟁에서도 사랑이 피어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도 사랑이 싹트고, 늙은 아저씨와 아가씨도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역경’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결코 아니다. 나이를 떠나 사느라 바빠 여자임을 잊고 사는 세상의 모든 진옥이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닌 경훈이 고백한다.
“이녁 소랑햄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고백이자 고단한 인생길 위에서 여성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사느라 가꾸지 못해 못생겨진 얼굴을 보듬고, 뒤로 감추고 싶게 마디 굵어진 손을 지그시 잡는다. 잘살아 왔어요, 잘했어, 이보다 큰 위로가 있을까.
이 기막히게 ‘빛나는 순간’을 위해 배우 고두심은 실제의 하얀 얼굴을 감추고 더 나이 들게 분장하고, 배우 지현우는 특유의 포근한 멜로 감성과 대한민국 제일의 눈웃음을 한껏 끌어올려 하나가 됐다. 제작사와 감독의 뚝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느 멜로가 그러하듯 남녀로 어울려 보이게, 세상의 선입견에 영합해 나이 차는 있지만 어색하지 않게 ‘연출’하지 않았다. 외양보다 진심에 작품의 힘을 썼다.
지나온 인생을 위로받고 시작해 바다처럼 푸르고 깊은 사랑으로 더 큰 위로를 받게 되는 영화 ‘빛나는 순간’. 사랑하는 이, 사랑 나누고픈 이와 손잡고 ‘빛나는 순간’을 맞이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