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 없는 전쟁? 미소 짓는 중국…해상 ‘실크로드’ 급부상 [판 뒤집힌 물류망③]
입력 2026.06.11 06:00
수정 2026.06.11 06:00
시나리오에 없던 중동전쟁 장기화
새로운 물류망 찾기 나선 세계 경제
에너지·AI 앞세운 중국에 새로운 기회
해상 실크로드 중심 ‘일대일로’ 진화
미국과 이란 전쟁은 표면적으로 중동 지역에 국한된 군사 충돌로 보인다. 실제는 다르다. 전쟁이 남긴 가장 큰 지정학적 변화는 전장 밖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이란 모두 상당한 경제·외교적 부담을 떠안은 상황에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국가는 중국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전쟁은 승자 없는 소모전으로 끝나는 양상이다. 이후 국제 물류와 에너지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중국은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중국이 수년간 추진해 온 일대일로(BRI·Belt and Road Initiative) 전략이 새로운 전기를 맞으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축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중동에서 존재감을 한층 키우고 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중동을 단순한 원유 수입처가 아니라 유라시아 경제권을 연결하는 핵심 거점으로 인식해 왔다. 일대일로 전략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인 ‘해상 실크로드’ 역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중동,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거대한 물류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한다.
김우진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지난 4월 ‘중동전쟁에 따른 중국경제의 반사이익’ 보고서를 통해 “이번 중동 전쟁이 세계적으로 에너지 안보 구축을 위한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촉매제로 작용, 재생에너지 관련 글로벌 공급망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국이 상당한 수혜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전쟁 이후 중국은 이란과의 경제·에너지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중동 지역 항만과 물류 시설 투자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이 군사적 대응에 집중하는 사이 중국은 항만과 철도, 에너지 시설 투자 등을 통해 장기적인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중국은 이미 중동 주요 항만 곳곳에 깊숙이 진출해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이집트 등 주요 국가의 항만 개발 사업에 참여하며 물류 거점을 확보해 왔다. 중동이 세계 에너지 공급의 핵심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시설 투자가 아니라 미래 공급망 주도권 확보 전략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번 전쟁은 중국에 새로운 ‘초크포인트(Choke Point)’를 안겨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중국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공급망 무기는 희토류였다. 전기차와 반도체, 방위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생산과 정제 과정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확보하면서 글로벌 산업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중동 전쟁 이후 중국 영향력은 희토류를 넘어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동의 불안정성이 반복될수록 세계 각국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전환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원유 공급망이 지정학적 갈등에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생에너지 공급망의 상당 부분 역시 중국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은 태양광 패널 생산에서 세계 시장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태양광 발전에 필요한 폴리실리콘과 웨이퍼, 셀, 모듈 등 대부분의 생산 공정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풍력발전 분야도 마찬가지다. 풍력 터빈 제조 능력은 물론 관련 부품 공급망에서도 중국 기업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해상 실크로드 바탕 물류망 장악 노리는 중국
배터리 산업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의 핵심인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능력에서 중국은 세계 시장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배터리 소재와 정제 과정, 생산설비까지 포함하면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김 책임연구원은 “중국은 전기차, 배터리, 발전설비 등 관련 산업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글로벌 수요 확대의 최대 수혜국이 될 것”이라며 “중국은 재생에너지 관련 산업이 대외 수출과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견인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기여도는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과거 세계 경제가 중동의 석유에 의존했다면 미래 경제는 중국이 장악한 청정에너지 공급망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이 이번 전쟁 최대 수혜국으로 중국을 지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쟁은 중동의 지정학적 위험을 부각시켰다. 이는 각국 에너지 전환 정책을 가속하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재생에너지 산업 전반에 대한 투자 확대를 촉진하면서 중국이 가진 산업적 우위가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20세기가 중동 산유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 중반은 청정에너지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의 시대가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한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중국이 단순한 생산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재생에너지 산업을 기반으로 물류와 금융, 디지털 시설까지 결합한 새로운 경제권 구축을 추진 중이다. 일대일로가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연결하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해상 실크로드 확장은 이러한 전략의 핵심이다. 중국은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항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미래 물류 흐름을 선점하려 하고 있다. 물류망을 장악하는 국가는 상품 이동뿐 아니라 에너지와 자본, 기술의 흐름까지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곧바로 패권 장악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국과 유럽 역시 공급망 재편과 청정에너지 산업 육성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도 점차 강화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전쟁이 글로벌 공급망 경쟁의 무대를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과거 세계가 석유 수송로와 해협을 둘러싸고 경쟁했다면 앞으로는 배터리와 태양광, 희토류, 청정에너지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적도 우방도 없다…해운·조선·항만 강한 한국의 선택은 [판 뒤집힌 물류망④]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