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5>] 해장술 생각
입력 2022.06.22 14:01
수정 2022.06.20 15:07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5화 해장술 생각
이희수는 이철백이 건네 준 책자의 표지를 넘겨보았다. 내지 상단에 단편소설 간디, 그 아래쪽으로 저자 김석규가 출력되어 있었다. 이희수는 큰 기대감 없이 대충 내용을 훑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일곱 시가 넘어버렸다. 지난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비몽사몽간에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입안에선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내는 겨우 돌 지난 딸 지우를 업은 채 양손 가득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여보. 그냥 가면 어떡해. 나 데리고 가야지.”
평소 아내의 차를 타고 출근하는 처지라 사정을 해보았지만 아내는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지우를 처형 댁에 맡겨야 했기에 아내의 출근은 항상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정우야. 엄마 화 많이 났냐?”
“몰라!”
얼마 전 여름방학을 맞은 아들 정우는 TV에 시선을 붙여두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정우의 쌀쌀맞은 행동으로 봐서 간밤에 뭔가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내심 불안했지만 우선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드러누운 자리에서 다시 곯아 떨어졌다. 재차 눈을 떴을 때 시간은 거의 아홉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출근준비를 서두르면서 어제 입었던 바지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달랑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다. 술꾼의 백지수표인 신용카드는 이미 아내에게 압수당한 지 오래였다.
“정우야, 돈 좀 있냐?”
“내가 돈이 어딨어? 용돈 얼마 주지도 않으면서.”
정우의 핀잔에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서랍을 뒤적거렸다. 정우 통장에 저금하려고 아내가 넣어둔 이만 원이 있었다. 나는 그걸 챙겨 아파트 정문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는 기사에게 중앙동으로 가자고 일렀다. 택시가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말티고개를 넘어갈 때 나는 술 냄새가 날까봐 입을 꾹 다물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택시는 어머니께서 잠들어 계신 영락공원을 지나 옥봉동 삼거리에서 정지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했다.
“진짜 요즘처럼 택시 어려운 적 없어요.”
택시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짐짓 못 들은 척하며 침묵을 지키려했으나 그만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탑승 후 처음으로 정차해서 시간이 난 택시기사가 말을 이었다.
“택시해서는 밥 못 먹어요.”
“그렇죠. 우리 형과 친구도 택시 하는데 사납금 넣기도 힘들다 하더라고요.”
나는 술 냄새 때문에 조심한다고 했건만 엉겁결에 그만 대화 속으로 불쑥 들어오고 말았다.
“저는 투잡합니다. 건강보조식품 말이죠.”
“아, 전에 우리 형도 겁외사에서 홍화씬가 뭔가 팔곤 했는데.”
“제가 직접 파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영업사원 관리만 합니다.”
“그럼 사장님이시군요.”
“뭐, 꼭 사장이랄 수는 없지만. 하하, 그러고 보니 사장이군요.”
택시기사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나는 남아있는 술기운의 영향으로 부지불식간에 무장해제 되어 오히려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업은 잘 되시나요.”
“어휴, 안 돼요. 처음엔 삼백, 사백씩 들어왔는데 요즘엔 일, 이백도 힘들어요.”
“그럼 사무실 임대료 내며 운영하기도 빠듯하겠군요.”
“처음엔 직원들 밥을 식당에서 사줬어요. 한 끼에 열 명이면 오만원이죠. 하루 이틀이지 그것도 부담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에서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만들었죠. 싱크대 들이고 가스레인지 들이고.”
“사장님이 그럴 정도면 영업사원은 진짜 힘들겠군요.”
별안간 내 오지랖이 발동했다. 택시기사 걱정해 주다가 뜬금없는 영업사원 걱정이었다.
“그 사람들도 투잡하죠. 보험하면서 이거 하는 사람 있고, 또 시골 이장도 있어요. 농사지으면서 영업하죠.”
“영업 잘 안 되거나 하면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네요?”
“그래서 에어컨을 안 넣잖아요. 시원하다고 아예 하루 종일 앉아있으면 전기료 감당 안 돼요.”
기사가 대단한 아이디어인 것처럼 반색하며 말했다.
“술도 많이 마시겠군요.”
“그럼요. 어제도 택시 마치고 오전에 사무실 나가보니까 이장이 족발을 사와서는 술 한 잔 하자더라고요. 물건 값 오십만 원이 아직 미납 중인데 무슨 돈으로 술을 사왔냐고 하니까 글쎄 내게 부탁할 게 있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뇌물을 좀 쓰겠다는 건데 대뜸 외상으로 물건 오십만 원어치만 더 달래요. 그걸 팔면 백만 원을 손에 쥘 수 있거든요. 딱 두 배 장사라.”
“그래서요?”
“안된다고 그랬죠. 물건 외상으로 가져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특히 술 먹는 사람한테는 더더욱 그렇죠. 술 먹으면 사실 영업 안하거든요. 그리고 외상 물건 팔아서 그 돈으로 대개 술 먹는데 써버려요.”
택시기사의 말에 마치 내가 술꾼들의 대표나 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혹시 술 냄새가 운전석에까지 풍길까봐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택시가 경찰서에 도착하기 전 나는 미리 택시비를 지불하고 우체국 앞에서 하차했다.
“김 형사. 오늘 술 냄새 많이 나는데 하루 쉬는 게 어때.”
형사팀장이 숙취에 따른 나의 행동 패턴을 예상하고는 선수를 쳤다. 나를 사무실에 놔뒀다간 점심시간에 해장술 마셔야 한다며 누가 말릴 틈을 주지 않고 음주를 강행한다든지 또한 그렇게 발동이 걸리면 아예 식당에 죽치고 앉아서 동료형사들을 차례로 불러내어 사무실 일을 마비시킬 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형사팀장의 예상은 기우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작정하고 출근한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들통 나서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막무가내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럴까요. 동료들 보기도 그렇고, 저도 많이 피곤하네요.”
나는 연가를 내고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정문 근무를 서는 의경 하나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나는 천천히 정류장으로 걸어가서 가장 먼저 도착한 시내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텅 빈 시내버스의 뒷좌석에 앉아서 얼떨결에 얻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다. 집으로 갈까. 집에 가면 정우가 엄마에게 이를 테니 무마용 당근이 필요했다. 점심 때 짜장면 한 그릇 시켜주면서 비밀 지켜 달라 그럴까. 난 막걸리 한통 사들고 가서 마시고. 술 앞에선 장사 없다는 말처럼 유치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