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3>] 혼수상태
입력 2022.06.15 13:55
수정 2022.06.14 10:56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3화 혼수상태
이윽고 박미옥과 지우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김석규는 왜 이렇게 늦었냐고 화를 낼 기력도 없을 만큼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그렇다고 과호흡이 왔다는 걸 알리는 것은 본전도 찾지 못할 어리석은 소행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어제 미친 군인처럼 미친 군인의 노래를 부를 때 알아봤어. 박미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김석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핏기 없는 얼굴로 승강기에 올랐다.
김석규가 건물 5층에 내려 하객들로 붐비는 로비를 지나 혼주와 신랑에게 인사를 건네고 접수대에 축의금 봉투를 한 무더기 쏟아놓은 후 예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호흡 증후군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석규는 식장 안에 마련된 좌석 뒤쪽에 자리를 잡고 금방이라도 심장이 경직되어 정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누며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박미옥이 인상을 북 쓰며 눈치를 하더니 급기야 허벅지를 꼬집었다. 김석규가 마지못해 자세를 고쳐 앉긴 했으나 다시 무너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석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박미옥에게 비닐봉지 가진 거 있냐고 물어보았다. 과호흡 증후군의 응급조치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본인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도로 마셔서 산소포화도를 낮추는 방법이 있었다. 박미옥은 찢어져라 눈을 흘기면서도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은행통장 비닐커버를 내밀었다. 김석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걸 벌려 입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호흡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닐봉지만큼 내뱉은 숨을 충분히 담지 못해 호흡은 자꾸 거칠어지고 가슴은 꽉 조이듯 경직되는 것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사진 촬영이 있다는 사회자의 말에 김석규는 비닐커버를 입에 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미옥이 만면에 웃음 대신 인상을 북북 쓰며 지우를 데리고 따라 일어섰다. 김석규는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뷔페를 건너뛰었다간 두고두고 바가지를 긁히겠다 싶어 죽을힘을 다해 식당으로 허적허적 걸어갔다.
뷔페에는 적들이 연합군 동맹을 과시하며 주둔해 있었다. 김석규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적진 속을 걸어 들어갔다. 당장 포로로 잡힌다 한들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적에게 대항할 엄두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김석규는 패잔병처럼 쪼그라든 몸으로 적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하지만 거기서도 적들은 탁자를 점령한 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김석규는 적들의 사주경계에 포착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역전의 용사 체면에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노릇이었지만 우선은 살고 볼 일이었다.
김석규가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적들도 먼저 도발하는 일은 드물었다. 비교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남북관계라고나 할까. 도발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응징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서로 경계만 강화했지 병력이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오늘은 과호흡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이라 김석규가 먼저 적에게 총부리를 겨눌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김석규는 음식을 챙겨온 박미옥에게 비닐봉지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통장 비닐커버 만으로는 과호흡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미옥이 한없이 깊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뷔페 입구로 가 안내원에게 비닐봉지를 부탁했지만 안내원은 매우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석규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비닐커버를 코와 입에 야무지게 대고 거칠게 호흡을 했다. 옆 탁자에 앉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이상한 눈빛으로 김석규를 쳐다보았다.
박미옥이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김석규 앞에 탁, 내려놓았다. 김석규가 죽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 하지만 죽 한 모금은 입 안에 맴돌 뿐 식도를 향하지 못했다. 이 부드러운 죽마저도 목구멍을 막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김석규는 가족의 식사시간만큼은 최대한 보장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구의 안내원을 찾아갔다. 안내원은 마치 경호원처럼 검은 정장차림에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 있어요?”
안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팩이라도 없어요? 하도 못해 종이 가방이라도.”
“그런 거 없습니다.”
안내원이 딱 분질러서 말했다. 김석규는 음식물을 싸가지고 갈 봉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응급처치를 위한 거라고 사정을 하고 싶었지만 안내원의 앳된 얼굴을 보고는 자괴감이 들어 그냥 돌아섰다. 김석규가 얼굴 표정을 한껏 찌그러뜨려서 자리에 돌아왔지만 박미옥과 지우는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맛나게 먹고 있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나 먼저 차에 가 있을게. 김석규는 더 이상 가족을 배려할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석규는 뷔페를 나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로비에 깔린 카펫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서 헛소리를 많이 하셨다더군요.”
이희수가 검지로 뿔테안경을 치켜 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김석규는 부산의 한 예식장에서 119구급차량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혼수상태에서 아주 무시무시한 말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한강철교 폭파, 낙동강 전선 사수, 인천상륙작전, 북진통일, 압록강철교 폭파, 만주폭격 등 6.25 전쟁 때나 나왔음직한 용어들이 김석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데 의료진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침상에 누운 사람이 이승만인지 맥아더인지 잠시 헷갈려 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내 집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소령.”
김석규가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 치뜨며 물었다.
“대여섯 달 정도는 우리 병원에 모셔두고 편히 쉬시라고 했습니다. 영부인께서 많이 지쳐 보이더군요.”
이희수의 말에 김석규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간호사가 김석규를 데리고 나간 후 이희수는 간밤의 숙취로 무거워진 머리를 식힐 겸 창문을 활짝 열고 정원의 벚나무에 시선을 던졌다. 달달한 벚꽃향기가 진료실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이희수는 목 운동을 하며 무심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고개를 넘어 병원 쪽으로 다가오는 택시를 발견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