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통령, 검찰개혁 속도조절 당부…재보선 의식한 '전략적 모호성'
입력 2021.03.09 04:00
수정 2021.03.09 05:07
檢 기소-수사권 분리에는 힘 싣고
중수청 설치는 검찰 반박 의식해
후반기 국정 동력 타격 우려한 듯
윤석열 직접 언급 대신 檢 비판도
"'국민을 위한 개혁'이라는 큰 뜻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구체적인 실현방안에 대해서는 절차에 따라 질서있게, 그리고 또 이미 이루어진 개혁의 안착까지 고려해 가면서 책임 있는 논의를 해 나가길 당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검찰의 기소-수사권 분리 방침에는 힘을 실으면서도, 검찰의 반발을 의식해 '속도조절'을 당부했다.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를 둘러싼 검찰 등의 반발 여론을 의식한 걸로 보인다.
이날 문 대통령의 법무부·행정안전부 권력기관 개혁 관련 업무보고에서의 관심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사퇴와 관련한 언급 여부였다. 문 대통령이 윤 전 총장의 사퇴 후 나흘 만에 검찰개혁을 포함한 권력기관 개혁을 논의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윤 전 총장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대신 검찰개혁에 반발하고 있는 검찰 조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문 대통령은 "검찰권의 행사가 자의적이거나, 선택적이지 않고 공정하다는 신뢰를 국민들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며 "대다수 검사들의 묵묵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검찰개혁은 검찰이 스스로 개혁에 앞장서야만 성공할 수 있다"며 "특히 사건의 배당에서부터 수사와 기소 또는 불기소의 처분에 이르기까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규정과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는 제도의 개선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견제와 균형, 인권 보호를 위한 기소권과 수사권 분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며 검찰의 수사-기소권 분리 논의 취지에는 동의했다. 다만 검찰 내부의 다양한 의견 수렴 필요성을 강조한 뒤 "질서있게, 그리고 또 이미 이루어진 개혁의 안착까지 고려해 가면서 책임 있는 논의를 해 나가길 당부한다"고 했다.
정가에서는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검찰개혁의 강도와 속도를 조절하라는 의미라는 관측이 나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현재 검찰개혁특위를 중심으로 중대범죄수사청 신설 법안을 6월까지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중수청은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 핵심으로, 윤 전 총장은 지난 4일 이에 대해 반발하며 사퇴했다. 당시 윤 전 총장은 "이 나라를 지탱해 온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문 대통령이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직접 언급하면서도 중수청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속도조절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도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지만, 검찰의 반발을 의식한 '속도조절론'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사퇴 국면'으로 거세진 검찰의 조직적 반발을 달래고, '조국 사태' 때부터 이어진 청와대와 검찰 간 갈등을 최소화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검찰개혁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논란을 낳을 수 있고, 이는 임기 후반 국정동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재보선을 앞두고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이를 두고 '전략적 모호성'을 취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종근 시사평론가는 "이도저도 아닌 원칙적인 내용만 들어있다"며 "재보선을 앞두고 정치공학적 발언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 대통령이 지금은 속도조절을 당부할지 몰라도 재보선 결과에 따라 기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 투기 의혹과 관련, 검찰과 경찰을 향해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는 검찰과 경찰의 입장이 다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유기적 협력으로 국가 수사기관의 대응 역량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아직 투기 의혹의 일단이 드러난 상황이라 개인의 일탈인지 구조적 문제인지 예단하기 어렵지만, 검경의 유기적 협력으로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