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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스트 민족주의─트럼피즘이나 재이니즘이나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1.01.11 09:00 수정 2021.01.11 09:05

민주주의 본질을 공공연히 공격

집권당이 의회민주주의 파괴

“편 가르기 정치 민주주의의 적”

ⓒ데일리안 DB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전통적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는 역할을 담당한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는 국제 정치라는 보다 큰 그림 속에 형성된 트렌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 트렌드란 바로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의 득세다.”(프랜시스 후쿠야마, Identity, 이수경 역,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민주주의 본질을 공공연히 공격


물론 트럼프가 유일한 예는 아니다. 그보다 먼저, 많은 정치 리더들이 유사한 행태를 보여 왔다. 후쿠야마가 예시했듯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쇠퇴시키는 혹은 쇠퇴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트럼프의 경우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이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 전통이 유장하며, 그 틀이 견고하다는 세계인들의 인식체계를 뒤헝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정치의 심각한 좌절을 예고하며 등장했다. 그리고 그 붕괴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퇴장하고 있다. 미국의 의사당이 군중들에 의해 점거 당하고 그 일부였던 폭도들에 의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파괴와 모욕을 당한 것이다.


헐리우드 식 블록버스터 제작자들의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 사태를 유도한 사람이 바로 현직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인식돼 왔던 민주적 방식과 절차, 민주적 결정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보수정당의 후보로 대통령이 됐지만 보수정책, 보수주의는 선동 구호에 불과했다. 그가 공공연히 제시하고 추구했던 것은 트럼프주의와 트럼프의 이익뿐이었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긴 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세계적 범위에서 앞으로 오히려 더 뚜렷해질 것 같아서 두렵다. 그 속에는 대한민국도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그것보다 역사가 일천하고 견고성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그간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지속적으로 자행됐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민주주의의 원리, 이상, 목표에 대한 부정이나 공격은 없었다. 누구나 그 신봉자를 자처했다. 그러면서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위해 궤도를 이탈했던 것이 한국 현대정치사의 경험이다.


집권당이 의회민주주의 파괴


그런데 이제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공공연한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 정의를 독점한 세력, 바로 문재인 정권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민주화’를 자신들의 공로로 한국 정치사에 특허신청을 했고, 자기들의 이름으로 이를 승인하고 등록했다. 그 바탕 위에서 이들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의 길로 치달았다. 트럼프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문 정권은 ‘한민족 퍼스트’를 외쳤다. 집권세력은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안전보다 남북화해와 협력을 더 중요한 가치로 설정했다.


정권 측은 북한이 불만을 표하는 국방안보제도와 시스템을 하나하나 무력화시켰다. 국가보안법은 사문화 되다시피 했다. 남북군사합의서라는 것을 통해 휴전선 일대의 우리의 고도화된 정찰 역량을 약화시켰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도 중단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정원의 대북・대공 정보수집 및 수사 기능까지 박탈해 버렸다. 이들의 민족지상주의는 민족공동체주의를 수반하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조화되기가 불가능한 이념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판단의 주체는 정권측일 수밖에 없다. 평등·공정·정의의 객관적 기준은 없다. 정권을 잡은 측이 개념 규정권을 갖는다. 민족공동체를 전제하면 자유민주주의적 방식·과정·결과는 불의(不義)한 것이 되고 만다.


이들에게 정치는 선이 악을 징벌하고 척결하는 과정이다. 불의를 쓸어내기 위해선 비상한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 정권측은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적이고 전형적인 예가 의회민주주의의 파괴다. 이제 국회는 없다.


정당을 정당이게 하는 터전이 국회다. 그런데 민주당은 자신들에게 존립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국회를 짓밟기 시작했다. 정권의 필요에 따라 법을 만들고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면서도 그게 노예의 행태인지를 모르는 빛이다.


혼자 저지르기는 어렵지만 무리에 속하면 쉽다.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는 문 대통령과 정권의 실세들이 있다. 그들이 건재해야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이 온전히 지켜진다는 판단이 충성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더 무서운 상전이 있다. 정권 실세들의 뒤에 버티고 있는 극렬 지지 세력이다.


“편 가르기 정치 민주주의의 적”


친문이라고도 하고 대깨문이라고도 하는 이 세력이 어느새 주인의 지위에 올랐다. 이제는 문 대통령 까지도 이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팬덤정치의 무서움·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팬덤정치는 권위주의 정권의 출현을 부추긴다. 민주정치 파괴의 핵심 인자가 되는 것이다.


‘파란장미시민행동’이란 친문 단체가 더불어민주당 및 열린민주당 의원들에게 “검찰수사권 완전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요구하고 있다고 언론들이 보도했다. 여러 명의 의원이 서약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 정권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다. 아마 여권 의원들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인식할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 민주정치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 준 것처럼 문 정권이 한국 민주정치를 아주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나 아닌가 해서 조마조마하다. 자제할 줄 알면 파국을 면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의 좌절에서 배울 일이다. 대중 정치인·정치세력이 대중을 중시하는 것이 문제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개인적·집단적 이익을 위해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에 아부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태도다. 대중의 민족적 분노를 부추기고 그걸 권력 강화의 동력으로 삼는 문 정권은 트럼프의 좌절을 절박한 경고음으로 여겨야 한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글에 눈길이 간다.


“국민을 차별하고 편 가르며 선동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독선과 불통의 정치는 종국에 국민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설득보다 더 쉬운 것이 선동이다. 대화보다 더 쉬운 것이 독단이다.”


“어렵지만, 힘들지만 더 설득하고 더 대화하며 강퍅한 ‘우리들만’이 아니라 너나없이 다 함께 잘 사는 나라 민주주의 모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어떤 심정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현 정권의 반성문 같은 느낌이 든다. 진실로 그런 마음이었기를 바란다. 그게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우고 정권을 구하는 길이다. 특히 선동정치는 이제 그만둘 때가 됐음을 각성해야 하겠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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