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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태의 빨간맛] '사법부 판단 존중'이 외교를 지웠다

강현태 기자 (trustme@dailian.co.kr)
입력 2020.10.15 07:00 수정 2020.10.15 05:13

獨 베를린시, 평화의 소녀상 철거 '보류'

日, 외교 수장까지 나서 철거 압박

韓, '사법부 존중'으로 개입 여지 없어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자료사진). ⓒ뉴시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자료사진). ⓒ뉴시스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철거가 보류됐다. 소녀상 설치를 주도했던 코리아협의회가 베를린 법원에 철거 명령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영향이다. 미테구청은 법원 판단이 나올 때까지 추가 조치를 내리지 않기로 했다.


독일 현지 시민들의 연대로 소녀상 철거를 막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정작 웃고 있는 쪽은 일본일 것이다.


한국 외교부는 일본과 갈등을 빚어온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등과 관련해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3권 분립 하에서 사법부 결정에 대해 행정부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소녀상 문제에 있어 일본은 외교 수장까지 나서 철거를 압박하고 있지만, 한국 외교부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움직임에 대해 한국·일본 정부가 외교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점잔을 빼고 있다.


한국 외교부는 소녀상 문제와 관련해 어떠한 '공식적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처지다. 독일 법원이 개입된 상황에서 만약 우리 외교부가 목소리를 낸다면, '사법부 판단 존중'이라는 대일 외교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독일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데 대해 "독일 법원에서 독일법을 바탕으로 한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독일에서 소녀상 철거 문제가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 사유지 공원에 세워진 소녀상은 일본 압박으로 '일본군 성 노예' 역사를 담은 비문(碑文)이 철거된 바 있다. 현재 해당 소녀상은 설치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덩그러니 조형물만 남겨진 상태다. 이후 독일 한인회와 시민단체들이 외교부의 소극적 대응을 지적해왔지만, 외교부는 '소녀상과의 거리두기'를 완화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외교에 있어 일관된 원칙은 금과옥조다. 하나 이따금 원칙을 구부려 여지를 남기는 게 국익에 부합할 때도 있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 여파 속에서도 '원화결제 계좌'라는 '우회로'를 뚫었듯, 대일 외교 역시 '사법부 판단 존중'의 틀을 뛰어넘는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문제는 일본을 향한 원칙이 조금만 구부려도 부러지는 지경에 다다랐다는 점이다. 이제 와 유연성을 논하기엔 내지른 '죽창'이 너무도 날카롭고 단단했다. '극일'로 포장된 반일감정 고취에 정권 지지율은 올랐을지 몰라도 외교가 발붙일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현태 기자 (trustm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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