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폐증 얻고 우울증 앓다 극단 선택…법원, 산재 인정한 이유는 [디케의 눈물 370]
입력 2026.09.29 17:05
수정 2026.09.29 17:10
1986년 진폐증 진단 후 장기간 요양…호흡곤란·합병증에 우울증 악화
법원 "정신적 억제력 현저히 저하돼 합리적 판단 어려운 상태서 사망"
공단은 인과관계 부정했지만…법원 "투병 과정과 사망 상당인과관계"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탄광에서 일하다 진폐증을 진단받은 근로자가 장기간 투병생활 끝에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사건에 대해 진폐증으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악화돼 사망에 이르렀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0부(부장판사 정은영)는 최근 망인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진폐유족연금 및 장례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A씨는 탄광에서 광원으로 근무하다 1986년 진폐증을 진단받았다. 이후 진폐증으로 요양생활을 이어오던 중 2023년 10월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이 '목맴'으로 기재됐다. A씨의 자녀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진폐유족연금과 장례비를 청구했지만 공단은 이듬해 3월 진폐증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자녀들이 제기한 심사청구와 산업재해보상보험 재심사위원회 재심사청구도 모두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유족 측은 A씨가 진폐증과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으면서 호흡곤란이 악화됐고 진폐합병증까지 발생해 수면장애와 불안장애 등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망 직전 진폐합병증인 기흉과 관련된 증상으로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됐고,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유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A씨가 업무상 질병인 진폐증으로 발생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악화되면서 정신적 억제력이 결여되거나 현저히 저하됐고,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살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주목한 것은 진폐증 진단 자체보다 이후 이어진 장기간의 투병 과정이었다. A씨는 진폐증으로 요양 대상자로 판정된 뒤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했고, 불안장애와 수면장애, 우울 에피소드 등을 진단받은 뒤에도 같은 증상으로 지속적으로 진료를 받았다.
특히 사망하기 약 1년 전부터 폐기능이 급격히 악화됐고 A씨는 지속적으로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재판부는 호흡곤란이 불안과 공포를 증가시키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봤다. 또 진폐합병증으로 기존 불안장애와 우울 증상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다른 질병이 불면증이나 우울증의 주된 악화 원인이 됐다고 볼 만한 사정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서울행정법원·서울가정법원 ⓒ데일리안DB
A씨가 생전에 남긴 말도 판단 근거가 됐다. A씨는 의사로부터 폐질환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기력도 없어 일상이 너무 힘들고 지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취지로 호소했다. 법원 감정의는 기흉과 객혈, 가래 등 중증 폐질환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겪은 공포감이 자살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호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질병의 악화와 전반적인 신체 기능 저하가 삶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됐고, 장기간 투병생활과 고령이라는 사정까지 고려하면 그 영향이 더욱 컸을 것으로 봤다.
김소정 변호사(김소정 변호사 법률사무소)는 "산재보험법 제37조 제2항은 원칙적으로 근로자의 고의나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을 업무상 재해에서 제외하지만, 업무상 질병으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발생한 자해행위는 예외적으로 업무상 재해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기간의 진폐증 투병과 중증 폐질환 합병증으로 인한 극심한 호흡곤란과 통증, 질식에 대한 공포 등이 지속적인 신체적·정신적 외상으로 작용해 우울증이 심해지고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자해가 발생했다면 자발적 선택이 아닌 질병 경과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는지 등을 종합해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