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유출 한 번에 수백만명 소송?…‘옵트아웃·소급적용’ 유통업계 새 변수
입력 2026.09.18 06:37
수정 2026.09.18 06:37
개인정보 유출 잇따른 유통가…소급 적용 여부 촉각
옵트아웃 도입 땐 잠재적 배상 규모 확대 가능성
과징금 강화에 집단소송까지…기업 부담 확대 우려
소상공인 부담도 가중…소공연 “생존 위협”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전경.ⓒ뉴시스
쿠팡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피해 고객에게 1인당 1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조정안을 거부하면서 집단소송제 확대 도입 요구가 다시 커지고 있다.
다만 기업들은 제도 도입 시 법적·재무적 부담이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소급 적용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최근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잇따른 유통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쿠팡은 지난 11일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가 지난해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해 제시한 '피해자 1인당 10만원' 배상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전달했다.
앞서 소비자분쟁조정위는 소비자 50명이 집단분쟁조정을 신청한 데 대해 쿠팡의 위자료 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1인당 10만원을 현금 또는 쿠팡캐시로 지급하라는 조정안을 내놨다.
쿠팡은 개인정보가 유출된 3370만명에게 1인당 5만원 상당의 구매이용권을 지급하는 등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자발적 보상안을 이행했고 현재까지 확인된 2차 피해가 없다는 점 등을 불수용 이유로 제시했다.
쿠팡 관계자는 "그동안 기울인 선제적인 노력과 더불어, 조정안 수용에 따른 대내외적 파급효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신중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쿠팡의 조정안 거부 이후 시민·노동계를 중심으로 집단소송제 확대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다시 커지고 있다.
집단소송제도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피해를 입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소송 절차를 통해 공동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에 따라 증권 분야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여연대 등이 참여하는 '안전한 쿠팡 만들기 공동행동'은 지난 16일 서울 광진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제도로는 대규모 소비자 피해를 실질적으로 구제하기 어렵다며 집단소송법 제정을 촉구했다.
공동행동은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피해 규모와 내부 통제 실패라는 쿠팡의 책임, 민감한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안의 중대성 등을 감안하면 피해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행 제도에서는 동일한 피해를 본 소비자들도 개별적으로 소송에 참여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국회에 집단소송법 제정을 촉구했다.
공동행동은 "집단소송법이 시행 중인 해외 주요국에서는 법원 판결에 앞서 기업과 피해자 사이의 민사합의로 사건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며 "정부와 국회는 집단소송법을 9월 정기국회 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정부·여당도 기존 증권 분야에 한정된 집단소송제를 전 산업으로 확대하는 입법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8일 소비자정책위원회 회의에서 “소비자 전 분야에 걸쳐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사각지대 없는 촘촘한 소비자 권리보장 체계를 만들겠다”며 집단소송법 제정에 힘을 보태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회에는 이미 집단소송 관련 법안이 14개나 계류돼 있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은 박균택 의원이 대표발의한 안을 중심으로 제도 확대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정부·여당의 움직임에 유통업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바로 '소급 적용' 가능성이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법안 중 상당수가 법 시행 전 3년 이내에 발생한 사건까지 소송 대상으로 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도 부칙에 ‘이 법은 법 시행 이전에 생긴 사유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에도 적용한다’고 돼 있다.
특히 최근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잇따른 유통업계에서는 소급 적용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법 시행 이전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까지 집단소송 대상에 포함될 경우 새로운 법적·재무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대표적으로 쿠팡은 지난해 12월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했다.
올해도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이어졌다. 지난달 무신사가 운영하는 29CM에서 고객 개인정보 약 16만건이 유출됐으며, 지난 6월에는 CU 편의점 택배 서비스를 운영하는 BGF네트웍스가 해킹 공격을 받아 고객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올해 초 교원그룹도 랜섬웨어 공격으로 554만명의 고객 정보가 유출 우려 범위에 있다고 신고했으며, 나이키코리아도 지난 7월 일부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과거 사고까지 집단소송 대상에 포함될 경우 많은 유통기업들이 집단소송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저희 같은 큰 회사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 작은 회사들은 진짜 못 살아남을 것 같다”며 “이슈 하나가 터지면 회사가 그냥 날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상공인연합회 로고.ⓒ소상공인연합회
소송 참여 방식도 유통업계가 주목하는 대목이다.
현재 여당은 별도 제외 신고가 없으면 모든 피해자에게 자동으로 판결 효력이 미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까지 판결의 효력을 받게 돼 대규모 이용자를 보유한 유통·플랫폼 기업은 한 번의 소송에 포함되는 피해자 수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에 따라 잠재적 배상 규모도 커져 기업의 재무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번 쿠팡 집단분쟁조정에서도 이러한 부담이 수치로 드러났다.
소비자분쟁조정위는 조정안을 쿠팡이 수용할 경우 조정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에게도 동일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후속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확인한 개인정보 유출 규모인 3756만여건에 조정위가 결정한 1인당 10만원을 단순 적용하면 전체 배상 규모는 약 3조7000억원에 달한다.
아울러 업계는 각종 규제로 행정제재 수위가 높은 상황에서 집단소송제까지 도입될 경우 기업 부담이 상당히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현행 제도에서도 기업은 개인정보 유출 등 법 위반이 발생할 경우 관계 당국의 조사와 시정명령, 과징금 등 행정제재를 받을 수 있다.
실제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서는 상당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앞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개보위)는 지난 6월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 등을 조사한 뒤 안전조치 의무 위반과 법적 근거 없는 개인정보 수집 등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에 대해 총 6246억81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와 함께 과태료 1680만원과 시정명령, 공표 및 공표 명령 등도 의결했다.
최근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으로 개인정보 유출 등에 대한 제재 수위도 높아졌다.
지난 11일부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위반행위를 반복하거나 1000만명 이상의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는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전체 매출액의 최대 1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됐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집단소송제까지 확대될 경우 하나의 사고를 둘러싼 기업의 비용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과징금 등 기업에 부과되는 제재가 상당한 상황”이라며 “여기에 집단소송까지 확대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옵트아웃 방식까지 도입될 경우 소송에 포함되는 피해자 규모가 크게 늘어날 수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상공인에는 경영 부담이 더욱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소상공인연합회(소공연)도 지난달 입장문을 통해 “다수 소비자 피해 구제라는 입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충분한 안전장치 없이 영세 자영업자에게까지 제도를 일률 적용하는 것은 소상공인을 소송 전선으로 몰아넣는 처사”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소공연은 대법원 및 장기 소송전에 대응할 체력을 갖춘 대기업과 달리 생계형 소상공인은 고액의 변호사 선임 비용 자체가 생존을 위협하는 장벽이라고 호소했다.
특히 음식점, 식품 판매업, 미용업 등 대면 소비자를 다수 상대하는 업종의 경우 악의적 소송 남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소공연은 “소비자 보호와 소상공인 보호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소비자의 실질적인 피해구제 방안을 마련하면서 영세 사업자의 생존권과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균형 있는 입법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