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내보낸다” 황재균 은퇴식서 빛난 KT 낭만 야구
입력 2026.09.14 08:12
수정 2026.09.14 08:13
치열한 1위 경쟁 속에서 타석과 3루 지킨 황재균
이강철 감독의 약속, 동료들 지원으로 작별 완성
황재균 은퇴식. ⓒ KT 위즈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때론 낭만이 팬들에게 감동을 줄 때도 있다. 바로 KT 위즈에서 공식적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은 황재균이 그러하다.
황재균은 13일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Bank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와의 정규시즌 홈경기를 통해 정든 유니폼을 벗는 은퇴식을 가졌다. 지난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방송계와 개인 채널 등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는 유니폼을 다시 입고 '선수 황재균'으로 섰다.
200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프로에 데뷔해 히어로즈와 롯데, 그리고 미국 메이저리그(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거쳐 2018시즌 KT에 둥지를 틀었던 황재균이다.
이날 황재균의 출전은 '은퇴선수 특별 엔트리 제도'를 통해 성사됐다. KT 구단 역사상 지난해 박경수 코치에 이어 두 번째로 적용된 사례다.
그러면서 그가 은퇴한 KT 위즈 역시 승부의 냉정함 대신, 함께 피땀을 흘린 동료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무엇보다 1위 자리를 놓고 피 말리는 레이스를 펼치는 와중에도 팀의 역사를 함께 쓴 레전드에게 통 큰 선물을 안기며 가장 아름다운 작별을 연출했다.
사실 이번 은퇴 경기는 시작 전부터 이강철 감독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KT는 경기 전까지 2위 삼성 라이온즈에 단 1경기 차로 쫓기는 아슬아슬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5연승의 상승세를 타고 있어 단 한 경기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판세였다. 1승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벤트 성격이 강한 은퇴 선수의 실전 투입은 리스크가 컸다.
주인공인 황재균 스스로도 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경기 전 "출전 여부는 감독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라면서도 "오늘 내가 시합에 나가는 것보다 팀이 5연승 기세를 이어가고, 1위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내비쳤다. 리더로서, 그리고 팀의 선배로서 개인의 마지막 기록보다 팀의 승리를 우선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강철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승부사이면서도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이 감독은 경기 전 황재균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힘을 실어줬다. 라인업에 이름만 올렸다 곧바로 빠지는 방식보다는, 경기 흐름상 여유가 생겼을 때 제대로 그라운드를 밟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곁들여졌다. 이 감독은 "내 스타일상 3점 차만 나도 무조건 내보낸다"며 출전 조건을 명확히 정했다.
황재균 은퇴식. ⓒ KT 위즈
감독의 약속과 베테랑의 마지막을 위해 뛴 것은 현역 동료들이었다. 동료들은 경기 초반부터 집중력을 발휘하며 이강철 감독이 제시한 '3점 차 리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방망이를 매섭게 돌렸다.
1회초 안현민의 적시타로 기선 제압에 성공한 KT는 3회 2점을 더 보태며 달아났다. 5회초 롯데의 반격에 3-2까지 턱밑 추격을 허용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5회말 공격에서 샘 힐리어드가 담장을 넘기는 결정적인 투런 홈런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5-2로 벌렸다. 마침내 이 감독이 예고했던 안전장치인 3점 차 리드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스코어가 갖춰지자 약속대로 문이 열렸다. 6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권동진의 타석이 오자 더그아웃에서 황재균이 헬멧을 쓰고 걸어 나왔다. 장내 아나운서의 연호와 함께 수원 위즈파크를 가득 채운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황재균은 1루와 3루 관람석을 향해 차례로 헬멧을 벗어 깍듯이 인사한 뒤 타석에 들어섰다. 비록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으나 그 누구도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프로 선수로서 마지막 타격 메커니즘을 보여준 황재균에게 관중석의 팬들은 물론 상대팀 더그아웃에서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황재균의 마지막 연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7회초 수비 시작과 함께 익숙한 핫코너, 3루수 글러브를 끼고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수년간 수많은 타구를 처리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플레이볼 선언 후 초구가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 경기장의 시간이 잠시 멈췄다. KT 벤치는 교체 신호를 보냈고, 황재균은 내야를 지키던 허경민, 김상수, 김현수 등 오랜 세월을 함께 피땀 흘린 동료들과 일일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라운드를 빠져나오며 전광판과 관중석을 둘러본 황재균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20년 가까운 프로 세월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이날 KT 구단의 결단은 치열한 순위 싸움이라는 현실적 명분 앞에서 구단과 감독, 그리고 동료들이 합심하여 베테랑의 마지막을 존중한 아름다운 사례로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