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아 “40대 중반에 만난 ‘엘리자벳’, 내 인생의 축제 같은 순간” [인터뷰]
입력 2026.09.13 14:01
수정 2026.09.13 14:01
6번째 시즌 엘리자벳 역으로 합류
11월 15일까지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
10대 소녀부터 60대 비극까지… 소리의 결로 빚어낸 무대
“40대 중반의 나이에 ‘엘리자벳’의 타이틀롤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고 자부심이 차올라요. 제 인생의 축제 같은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2012년 국내 초연 이래 관객들을 사로잡아 온 뮤지컬 ‘엘리자벳’은 세계적인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탄생시킨 오스트리아의 대표 명작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실존 황후 엘리자벳(1837~1898, 애칭 ‘씨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죽음’(Tod)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매혹적인 남성으로 의인화하고, 그녀를 암살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를 해설자로 세워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을 웅장하게 그려낸 대작이다.
지난달 16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엘리자벳’의 여섯 번째 시즌을 통해 배우 리나는 처음 엘리자벳으로 무대에 섰다. 10대 시절 말 타기를 즐기며 자유를 만끽하던 순수한 소녀부터,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사랑에 빠져 들어간 황실의 숨 막히는 억압, 그리고 60대 노년에 이르러 제네바 호숫가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극 전체의 거대한 서사를 홀로 이끌어가야 하는 무게감 있는 자리다.
배우 린아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작품 속 엘리자벳은 황실의 엄격한 규율과 시어머니 조피의 가혹한 통제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박탈당한다. 린아는 이 인물을 “시대와 불화했던 주체적인 여성”으로 정의했다.
“시골에서 아빠를 동경하며 자유롭게 자란 아이였잖아요. 하지만 사랑 하나만 믿고 들어간 황실은 철창 없는 감옥이었죠. 아이를 낳는 것만이 유일한 의무였고, 그 아이마저 시어머니에게 빼앗겼을 때의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지옥이었을 겁니다. 엘리자벳은 현대적인 가치관과 높은 지성을 지녔기에 그 억압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어요.”
극은 억압받던 엘리자벳이 곁을 맴도는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며 점차 황실의 권력자로 성장하지만, 결국 고독과 허무 속에서 스러져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린아는 인위적인 발성 기교보다는 인물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무대 위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10대 시절엔 바이브레이션을 줄이고 맑고 깔끔한 소리로 폭발적인 생기에 집중한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2막에서는 본연의 깊고 묵직한 호흡을 살립니다. 무엇보다 엘리자벳이 평생 감내해야 했던 삶의 고통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상처가 객석에 온전히 닿아야만, 마지막 순간 죽음을 맞이할 때 ‘이제야 비로소 평안에 접어드는구나’ 하는 해방감과 희열이 관객에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엘리자벳’의 가장 독창적인 장치는 바로 실존 인물의 곁에 머물며 끊임없이 그녀를 시험하는 초월적 존재 ‘죽음’이다. 린아는 연습 초반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나눈 대화에서 캐릭터의 본질을 찾았다고 말했다.
“실제 엘리자벳 황후는 걷기와 책 읽기를 좋아해 전담 낭독자를 둘 정도였는데, 그 낭독자의 수기에 특별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어요. 바다를 건너다 거센 폭풍우를 만났을 때, 모두가 갑판 밑으로 숨었지만 엘리자벳은 홀로 돛대에 몸을 묶어달라고 했다더라고요. 온몸으로 거친 비바람을 맞으며 배를 따라오던 검은 갈매기를 보고 ‘저게 바로 나’라고 말했다고요. 작가님은 그 갈매기가 곧 죽음이자 엘리자벳 자신이었고, 그 지점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셨어요.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 속에서 피어난 자신의 내면이자 상상인 거죠.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같은 선상에 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무대 위에서 엘리자벳과 직접 말을 섞지 않으면서도 내내 그녀를 관찰하고 비웃는 암살자 루케니와의 관계 역시 흥미롭다. 루케니는 굶주린 민중을 선동하고 낡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조롱하며 극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조율하는 해설자다.
“작가님 설명에 따르면 루케니는 20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에요. 구시대의 황실을 무너뜨려야 새 세상이 오니까요. 엘리자벳이 숨 막히는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모와 몸매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그녀만의 방어 무기였지만, 굶주린 민중과 새 시대를 대변하는 루케니의 눈에는 비판받아 마땅한 특권층의 기행이었을 겁니다. 비록 무대 위에서 직접 부딪히지는 않지만, 루케니의 날 선 시선과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팽팽한 호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MK뮤지컬컴퍼니
엘리자벳의 상징과도 같은 대표 넘버는 황실의 억압에 맞서 자유를 선언하는 ‘나는 나만의 것’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아리아 뒤편에는 살얼음판 같은 무대 메커니즘과의 싸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주일 넘게 개인 연습실을 빌려 오디션 영상을 찍으며 넘버를 수없이 다듬었어요. 하지만 실제 무대 위에 서니 차원이 달랐습니다. 회전무대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조명과 세트 동선까지 신경 써야 할 요소가 첩첩산중이었죠. 직전 장면의 슬픔이 가슴 깊이 차올라 눈물이 터져 나오면 정작 목소리를 내지 못해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바람에 숄이 드라마틱하게 날려야 하는 장면에서 숄이 반으로 접혀 펴지지 않아 속을 끓인 적도 있었고, 높은 계단 세트 위에서 부르는 ‘혼란의 시절들’은 발을 헛디딜까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긴장합니다.”
회전무대와 세트 전환이 잦은 대작인 만큼, 린아는 개막 전 파주에 마련된 연습 세트장에서 10주 동안 실제 무대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반복 훈련을 거듭했다. 이렇게까지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매달려 본 작품은 배우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치열한 연습 끝에 무대에 오른 그가 꼽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무기는 ‘2막에 최적화된 깊은 모성’이다.
ⓒEMK뮤지컬컴퍼니
“스스로는 ‘2막에 최적화된 엘리자벳’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무대에 서다 보니 감정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죠. 시어머니에게 자식을 빼앗기고 끝내 아들 루돌프를 비극적으로 잃어야 했던 어머니의 찢어지는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어요. 남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억지로 꾸며내기보다는, 매 장면에 충실하면서 제가 삶 속에서 겪은 모성과 슬픔의 무게를 더 섬세하고 현실감 있게 무대 위에 펼쳐내고자 합니다.”
2005년 걸그룹 천상지희로 연예계에 첫발을 디딘 린아는 이제 명실상부한 대극장 원톱 주연 배우로 우뚝 섰다. 그는 “뮤지컬을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한다.
“연출과 음악감독의 디렉션을 100% 신뢰하며 대본 안에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제 성향과 참 잘 맞았어요. 뮤지컬을 하면서 내면의 평온을 얻었고 소중한 가정도 꾸렸죠.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이 시점에 ‘엘리자벳’이라는 거대한 작품의 주역으로 설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제 배우 인생의 가장 찬란한 고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무대와 음악을 즐기시는 동시에,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다해 싸웠던 엘리자벳의 치열한 삶을 통해 관객 여러분도 각자의 삶을 버텨낼 깊은 위로를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