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투자·배급사 움츠러든 사이…한국영화계 '새 플레이어' 늘어난다 [영화 뷰]
부분 투자부터 메인 투자·배급까지
콘텐츠 기업·극장·제작사·일반 기업까지…다양해진 영화 투자 주체
바이포엠은 주요 배급사로 성장…신규 사업자 안착 가능성 보여줘
한국영화에 돈을 대는 주체가 다양해지고 있다. 대형 투자·배급사가 주도해온 시장에 콘텐츠 기업과 극장, 제작사, 일반 기업까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업자들이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한국영화 투자 위축으로 기존 사업자들이 신규 프로젝트에 신중해진 상황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업자에게는 시장에 진입할 틈을 만들어주고 있다.
올해 영화 투자·배급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에피소드컴퍼니가 대표적이다. 유튜브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로 출발한 유·아동 콘텐츠 기업 캐리소프트가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사업 영역을 전환하며 사명을 바꾼 회사다. 올해 개봉한 '군체', '와일드 씽', '호프' 등에 잇따라 투자하며 단기간에 영화 투자 포트폴리오를 넓혔고,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도라'도 첫 메인 투자·배급작으로 선보였다.
극장도 직접 투자자로 다시 나섰다. CJ CGV는 올해 영화 투자·배급을 전담하는 CGV픽처스를 출범시켰다. CGV는 2015년부터 CGV아트하우스를 통해 투자·배급을 해왔지만 2020년 '오! 문희'를 끝으로 관련 사업을 사실상 중단했다. 이후 배급을 중심으로 영화사업을 이어오다 약 6년 만에 투자 기능을 본격적으로 되살린 것이다. 지난 12일 개봉한 '오케이 마담2'가 CGV픽처스의 첫 투자·배급작이며 변요한·안재홍 주연의 '손 없는 날'도 투자·배급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쇼박스·CJ CGV·현대자동차
CGV의 재진입 배경에는 극장에 공급되는 한국영화 자체가 줄어든 상황도 자리한다. 올해 초 CJ ENM·롯데엔터테인먼트·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쇼박스·NEW 등 주요 5개 투자·배급사가 공개한 한국영화 라인업은 수입·배급 대행작을 제외하면 20편에 그쳤다. 기존 투자사의 작품을 받아 상영하는 극장이 직접 투자에 나서 콘텐츠 확보까지 맡게 된 셈이다. CGV픽처스는 대규모 텐트폴보다 대중성을 갖춘 중예산 상업영화를 중심으로 투자·배급한다는 계획이다.
제작사도 기존 투자·배급사에 작품을 맡기는 데서 벗어나 직접 영역을 넓히고 있다. '서울의 봄', '남산의 부장들' 등을 제작한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신세계 계열 콘텐츠 기업 마인드마크와 손잡고 공동 투자·배급 체계를 구축했다. 향후 5년간 양사의 제작·투자 작품에 상호 투자하고 배급하는 방식이다. 기획과 제작을 담당했던 제작사가 투자와 마케팅, 배급까지 관여하는 구조로 사업 범위를 넓힌 사례다.
영화산업 밖에서도 새로운 사업자가 들어오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4년 단편영화 '밤낚시'를 선보인 데 이어 한·미 합작 독립영화 '베드포드 파크'에 투자하며 처음 장편영화 투자에 나섰다. 현대차그룹 광고 계열사 이노션도 영화 개발·제작 플랫폼 '시네마바이브랜드'를 출범시켜 작품 기획부터 제작, 극장·OTT 공개까지 아우르는 사업을 시작했다. 브랜드 협업으로 시작한 영화와의 접점이 직접 투자와 제작 사업으로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새롭게 영화에 돈을 대는 주체들의 출발점과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콘텐츠 기업은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극장은 부족해진 상영 콘텐츠를 직접 확보한다. 제작사는 투자·배급까지 역할을 넓히고, 일반 기업은 브랜드 콘텐츠에서 출발해 영화 투자로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공통점은 기존 대형 투자·배급사 몇 곳에 집중됐던 한국영화의 투자 주체가 여러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불황이 오히려 시장의 진입 문턱을 낮추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제작되는 영화가 줄고 기존 자본이 보수적으로 움직이면서 검증된 감독과 제작사, 이미 제작이 상당 부분 진행된 작품 등에 신규 사업자가 참여할 여지가 이전보다 커진 측면이 있다.
앞서 영화시장에 진입한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새로운 사업자가 실제 주요 투자·배급사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온라인 광고·마케팅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바이포엠은 2022년부터 영화사업을 본격화했다. 특히 기존 투자·배급사가 선뜻 가져가지 않았던 작품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배우 리스크로 개봉이 불투명했던 '소방관'과 '승부', 기존 투자·배급사가 투자를 철회한 '히트맨2' 등이 대표적이다.
결과도 뒤따랐다. '소방관'에 이어 '히트맨2', '승부', '노이즈' 등이 흥행하면서 바이포엠은 2025년 상반기 영화관 매출액 기준 배급사 점유율 13.1%로 1위에 올랐다. 기존 투자·배급사가 위험 부담 때문에 외면하거나 투자를 주저했던 작품을 가져와 디지털 마케팅 역량을 결합하는 방식이 시장에서 통했다. 기존 대형 투자·배급사와 다른 업종에서 출발한 사업자가 불과 수년 만에 배급시장 상위권까지 올라설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셈이다.
신규 사업자의 투자 역시 규모와 방식에 차이가 있다. 메인 투자·배급을 맡아 작품 전체를 책임지는 경우가 있는 반면 이미 제작이 진행된 작품에 수억원을 넣는 부분 투자나 개별 프로젝트 단위의 참여도 있다. 현대차처럼 영화 투자 자체가 본업이라기보다 브랜드 콘텐츠 전략의 연장선에서 접근하는 사례도 있다. 때문에 최근의 움직임만으로 기존 대형 투자·배급사의 역할을 새로운 사업자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보기는 이르다.
그럼에도 투자 주체가 다양해지는 것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온 한국영화계에 의미 있는 변화다. 기존 투자·배급사가 움츠러든 자리를 콘텐츠 기업과 극장, 제작사, 일반 기업 등 서로 다른 배경의 사업자들이 채우기 시작했고, 앞서 시장에 들어온 바이포엠은 신규 사업자가 주요 투자·배급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새로운 플레이어들의 등장이 일시적인 투자에 그칠지, 침체된 시장에 지속적인 자금줄로 자리 잡을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