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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세련되게, 슬픔은 처절하게…네 모녀의 죽이는 '경주기행' [볼 만해?]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8.17 10:41
수정 2026.08.17 10:41

26일 개봉

"내가 용서하고 싶을까 봐 두려웠어."


영화 '경주기행'에서 엄마 옥실(이정은 분)이 딸 경주를 죽인 백상현(변요한 분)을 앞에 두고 던지는 이 한마디는, 이 영화가 사적 제재라는 익숙한 소재를 어떻게 다르게 통과하는지 보여준다. 사적 복수를 다룬 작품은 많았지만 '경주기행'은 우리가 예상하는 궤도를 서늘하게 벗어난다. 비극을 겪은 한 가족이 복수에 나서기까지의 과정과 그 끝에서 마주하는 감정을 세련된 블랙코미디와 밀도 높은 서스펜스로 풀어냈다.


'경주기행' 스틸ⓒ롯데엔터테인먼트

8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 그 딸의 생일을 맞아 엄마와 세 언니는 마치 여느 가족처럼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경주로 향한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고 화목한 나들이지만 봉고차 트렁크 안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갇혀 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경주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 하나를 죽이겠다고 납치까지 감행한 이 가족이 영 미덥지 않다. 벌레 한 마리만 나타나도 기겁하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우왕좌왕한다. '경주기행'은 살인을 결심한 사람들이 정작 그 일을 실행에 옮기려 할 때 벌어지는 간극을 웃음으로 바꾼다. 무거운 소재를 블랙코미디로 비틀면서도 인물의 고통을 희화화하지 않는 균형이 영리하다.


그 웃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건 네 모녀의 관계다. 엄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챙겨온 장녀 장주(공효진 분)는 늘 옥실의 편에 서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마음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딸이다. 엘리트 법대생인 둘째 영주(박소담 분)는 복수 계획 자체를 못마땅해하면서도 허술한 구석이 보일 때마다 머리를 써서 메운다. 옥실이 세 딸 가운데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이기도 하다. 차갑고 똑 부러져 보이지만 그 단단함 아래에는 여린 마음이 숨어 있다. 전직 프로레슬러 '퍼플 마그마' 동주(이연 분)는 영주와 정반대다. 생각하기 전에 몸부터 나가고 투박하고 철없어 보이지만, 경주를 향한 미안함을 깊게 품고 있다.


'경주기행'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오래 쌓인 서운함과 애정은 여행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새어 나온다. 늘 엄마 편이라 소홀해지는 딸이 있고, 어려워서 오히려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딸이 있다.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못하는 것도 가족답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가족의 정서지만 '경주기행'은 이를 눈물이나 희생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네 여자가 한 차 안에서 부딪치고 투닥거리는 모습을 블랙코미디의 리듬으로 끌고 가며 익숙한 정서를 세련되게 변주한다.


이 유쾌하고도 기묘한 여행의 공기는 백상현이 모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순식간에 달라진다. 앞서 허술하게만 보였던 복수는 더 이상 농담처럼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영화 역시 가족 코미디의 리듬을 걷어내며 장르적 긴장을 끌어올린다. 여기서 변요한의 연기가 힘을 발휘한다. 백상현은 자신의 죄 앞에서 끝까지 상대의 감정을 헤집는다. 변요한이 그 불쾌함을 과장하지 않고 현실적인 얼굴로 만들어낸 덕분에 옥실과 맞닥뜨리는 후반부의 감정도 더욱 거세진다.


산속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영화는 웃음을 완전히 거둬들이고, 한 엄마가 8년 동안 눌러온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정은은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옥실의 감정을 폭발적인 연기로 밀어붙인다. 옥실에게 경주가 죽은 날은 8년 전의 일이 아니다.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의 시간은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다. "내가 용서하고 싶을까 봐 두려웠어"라는 말이 무겁게 남는 것도 그래서다. 용서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지만 옥실에게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복잡한 감정을 이정은과 변요한이 팽팽하게 주고받으며 영화의 정점을 만든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복수의 성공 여부가 아닐지 모른다. 딸을 잃은 뒤 시간이 멈춰버린 엄마 옥실. 세 딸은 엄마의 계획에 동참함으로써, 혹은 그 계획을 말리려 함으로써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멈춘 시계를 다시 움직이려 한다. 방향은 다르지만 바라는 것은 같다. '경주기행'은 그렇게 복수극의 외피 안에 딸들이 엄마에게 건네는 가장 서툴고도 절박한 위로를 숨겨 놓았다. 26일 개봉. 러닝타임 111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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