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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WTO 가입 이끈 '경제개혁 설계자' 주룽지 전 총리 별세

김규환 기자 (sara0873@dailian.co.kr)
입력 2026.08.12 22:30
수정 2026.08.12 22:31

주룽지 중국 총리가 2003년 3월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개막식에서 임기 마지막 정부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경제개혁의 설계자’로 불리며 중국을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려 놓는 발판을 마련한 주룽지(97)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별세했다.


관영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공동 부고를 통해 주 전 총리가 병환으로 치료받던 중 이날 오전 11시 6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부고는 주 전 총리가 “무거운 짐을 자진해 지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며 그의 강한 추진력을 강조했다.


주 전 총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역경을 이기고 14억 중국인의 가장 사랑을 받는 국가지도자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28년 중국 중부 후난성 성도 창사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때 홀어머니를 잃은 뒤 큰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 성적을 보였다. 세 살 때부터 ‘논어’를 익혔고 ‘수호지’에 등장하는 108명의 ‘호걸’(두령)의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1951년 중국 이공계 최고 명문인 칭화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직에 입문해 지방과 중앙에서 경제정책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더욱이 1957년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려 당적이 박탈당했으며 문화혁명 때는 5년간 농촌의 ‘5·7 간부학교’로 하방돼 돼지우리 속에서 새우잠으로 지새우는 신산(辛酸)의 삶을 겪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문혁이 끝난 뒤 복권된 그는 1985년 자오쯔양 총리의 의뢰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게 경제문제를 보고하며 덩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1987년에는 상하이시장이 됐으며,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당시 군을 투입하지 않고 TV연설로 현지 학생들을 자제시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8년 말 상하이 시장에 오른 뒤 산업 구조조정과 푸둥지구 개발·개방을 추진했다.


1990년 초에 덩샤오핑에게 두 차례 푸둥지구 개발구상을 보고해 지지를 얻었고 그해 4월 중국 지도부가 푸둥자구 개발·개방을 결정했다. 오늘날 초고층 빌딩이 밀집한 푸둥금융지구는 그가 남긴 유산이다. 상하이에서 함께 일했던 시 당서기(일인자)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었다. 1991년 중앙정부로 올라가 국무원 부총리로서 1·3·5 개혁을 추진했다.


경제성장 확보가 1이요, 국유기업·금융체제·정부기구 정상화가 3이며, 식량유통·투자융자·부동산제도·의료제도·재정세제 개혁이 5였다. 기업 간 연쇄 부채인 ‘삼각부채’ 불리던 고질적인 국영기업 간 상호 부채 문제를 해결했다. 1993년에는 중국인민은행 총재를 겸임하며 경제개혁에 착수, 20% 수준이던 인플레이션을 3%대로 끌어내렸다.


당시 그의 거시경제 정책에 반발하는 지방 당서기들에게 “100개의 관을 준비하라. 99개는 탐관의 것이고, 한 개는 내 것”이라며 비장하게 개혁의 칼을 휘둘렀다. 1998년 3월에는 국무원 총리에 올라 국유기업·금융·정부기구의 3대 개혁을 추진했다. 2001년에는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 경제를 세계 시장에 편입시키기 위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을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중국의 세계 교역액은 당시 약 5100억 달러(약 721조원)에서 2025년 6조 5000억 달러로 무려 12배 이상 불어났다. 2001년 총리 기자회견에서는 은퇴 후 계획을 묻는 질의에 “온 힘을 다 바쳐 죽는 날까지 나랏일에 힘쓰겠다”(鞠躬盡瘁 死而後已)고 대답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인용한 그의 여덟자 답변은 친민(親民)총리의 어록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그는 중국 최고 지도부에서 보기 드문 직설적인 화법으로도 유명했다. 총리 취임 당시 관료들에게 “인민의 공복임을 잊지 말고 진실을 말하며 남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강한 추진력, 거침없는 언행, 엄격한 일처리로 중국에서는 ‘포청천’ ‘경제 차르’ ‘철혈재상’과 함께 ‘주사장’(朱老板)’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2003년 퇴임 후에는 공개 활동을 크게 줄이고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전통악기 얼후(二胡) 연주와 경극에 심취했다. 이후 출간된 ‘주룽지, 기자 질문에 답하다’와 ‘주룽지 연설실록’이 인기를 끌면서 부패와 관료주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개혁가를 그리워하는 ‘주룽지 열풍’이 낳기도 했다.


2011년 9월 중국 베이징의 한 서점에서 시민이 주룽지 전 총리의 저서를 살펴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세계 외신들도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주 전 총리가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졌으며 공식적으로 지도부의 문제를 인정할 줄 아는 예외적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주 전총리를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제개혁 가운데 하나를 설계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AP통신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 지도부의 관행에서 벗어나 잘못과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기도 했다"며 "공개석상에서 농담을 하고 때로는 자신을 소재로 웃음을 자아내면서 다소 무미건조했던 공산당 지도부의 이미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외국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했다.




김규환 기자 (sara0873@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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