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한 마디에 '임신 중지약' 도입 속도전?…의료계 "환자 안전 담보 못해"
입력 2026.07.21 10:42
수정 2026.07.21 11:22
정부, 불법 유통 차단 위해 ‘미프진’ 도입 검토 본격화
의료계 “처방 기준·책임 소재 불명확…환자 안전 우려”
“가이드라인·응급의료체계 마련 등 제도 선행돼야”
이재명 대통령이 7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정부가 임신중지 의약품인 ‘미프진’ 도입을 공식 검토하면서 의료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불법 유통에 따른 여성 건강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합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는 관련 법과 제도, 안전관리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 도입만 서둘 경우 의료현장의 혼란은 물론 환자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21일 의료계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 미프진 도입 방안 검토를 지시한 이후, 정부는 합법적인 관리체계 마련에 무게를 두고 관련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불법 해외직구와 가짜 의약품 유통으로 인한 여성 건강 피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7일 KBS 라디오 ‘전격시사’에 출연해 “약물이 허가될 경우 의료기관에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학회의 도움을 받아 임상진료지침과 안전사용 관리체계 마련을 준비하고 있다”며 “안전한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합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프진은 임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을 차단하는 ‘미페프리스톤’과 자궁 수축을 유도하는 ‘미소프로스톨’로 구성된 임신중지 의약품이다. 두 성분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 필수의약품 목록에 포함됐다. WHO는 전 세계 임신중지의 약 45%가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안전한 임신중지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에서 미프진이 합법적으로 판매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품목허가를 받아야 한다. 다만 식약처는 관련 법적 근거가 마련돼야 허가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이후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관련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서울 시내 한 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의료계에서는 관련 법과 처방 기준, 안전관리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약물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가장 우려 되는 건 이재명 대통령이 ‘의료진의 재량’으로 해당 약물을 처방하는 방안을 제시한 대목이다. 이 대통령은 14일 국무회의 당시 “(미프진 처방을) 의사의 양심과 재량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이걸 방치해 처방 없이 해외에서 막 사서 투약하는 것보다 낫다”고 언급했다.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미프진을 서둘러 도입하느라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이 처방 여부를 개별 의료진의 판단에 맡길 경우 의료현장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홍순철 고려대 안암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약물을 통해 유산을 유도하는 과정에서는 출혈이 발생할 수 있고, 심한 경우 자궁적출이나 사망에 이를 가능성도 있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고 해서 관련 형법이 폐기되거나 제도와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은 아니다. 관련 제도와 진료 지침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이 먼저 도입된다면 의료진의 책임 소재는 물론 환자들도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피임약을 먹듯 낙태약을 쉽게 복용하는 사례가 생길 수도 있는데,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누가 어떤 체계로 관리할 것인지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현장의 의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산부인과 진료 공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약물 복용 후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절한 치료가 제때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인제대 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임신중지 약물은 출혈을 유도하는 만큼 일부 환자에게서는 과도한 출혈이나 심한 복통 등이 나타날 수 있다”며 “특히 자궁외임신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약물을 복용할 경우 위급한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현재도 산부인과 진료 공백으로 응급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약물 복용 후 출혈이나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늘어날 경우 적절한 진료와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으로 제때 연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의료계는 관련 법과 제도, 의료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프진 도입이 무리하게 추진될 경우 전면적인 거부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최근 성명을 통해 “정부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임신중절 유도 의약품 미프진에 대한 초법적·편법적 도입 검토 지시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며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정책을 강행할 경우 전면적인 거부운동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