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거식증' 고백한 권진아가 바꾼 문장들 [가요 뷰]
입력 2026.07.18 07:51
수정 2026.07.18 07:52
비만 아닌 20대 여성 24% "난 비만"… 체중 강박 속 ‘아픈 몸’을 대변하는 음악의 확장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다정한 조언조차 가혹한 채찍질이 되는 날들이 있다. 새 앨범을 통해 거식증과 폭식증의 아픔을 용기 있게 꺼내놓은 권진아의 목소리는 왜곡된 미디어 알고리즘과 외모 규범 속에서 고통받는 이 사회 젊은 여성들을 어루만진다. 완성된 자기애가 아닌 ‘아프고 흔들리는 몸’을 대변하는 그의 음악은, 대중문화 속 여성의 서사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든든한 연대의 시작이다.
권진아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16일 소속사 어나더에 따르면 권진아는 전날 세 번째 EP ‘세이브 미’(SAVE ME)를 발매했다. 상처와 자기혐오를 숨기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꺼낸 앨범이다. 이 중 타이틀곡 ‘몬스터’(MONSTER)에서는 스스로를 괴물처럼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살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다. 자기혐오를 이겨낸 뒤 시작되는 성공담이 아니라 자기혐오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음 날로 향하는 이야기다.
권진아는 15일 진행한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이번 앨범의 출발점에 자신의 식이장애 경험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어린 나이에 데뷔한 뒤 얼굴과 몸, 목소리와 노래까지 싫어했으며 그 상태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날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택했다”며 “이 과정에서 오랜 시간 체형 강박에 시달렸고 거식증과 폭식증을 겪었다”고 말했다.
권진아의 고백은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질병관리청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약 23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4 지역사회건강조사’ 심층 분석에 따르면 비만이 아닌 20대 여성 중 24.4%는 자신을 비만이라고 인식했다. 같은 집단의 75.3%는 최근 1년 동안 체중을 줄이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답했다. 실제 비만 여부와 별개로 젊은 여성의 몸이 지속적으로 줄이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치료가 필요한 수준으로 이어진 사례도 증가했다. 지난해 9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대 섭식장애 진료 인원은 2020년 2203명에서 2024년 2538명으로 15.2% 늘었다. 2025년 상반기까지 5년 반 동안 진료받은 20대는 약 1만 4000명이었다. 이 기간 신경성폭식증 진료 인원 7942명 가운데 여성은 7528명으로 94.8%를 차지했다.
섭식장애는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질환인 만큼 진료 인원의 증가를 미디어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비만이 아닌 여성들까지 자신의 몸을 비만으로 인식하고 신경성폭식증 진료 인원의 대부분을 여성이 차지한다는 수치는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평가하는 문화적 환경을 함께 보게 한다.
무대와 직캠, 숏폼에서는 체중 변화와 몸의 선이 ‘자기관리’의 성패로 읽히고, 다이어트와 외모 관련 영상을 반복해서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타인과 자신의 몸을 비교하는 일을 일상으로 만든다. 이 현상은 한국식 외모 문화와 미디어 환경이 맞물린 결과다. 유현재 서강대학교 미디어학과 교수는 “미디어가 외모 규범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기보다 마른 몸을 프로페셔널함과 자기관리의 증명으로 여기는 대중의 욕망과 플랫폼 알고리즘이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라며 “방송사에 책임을 묻고 가이드라인을 만들라고 요구해도 결국 시청률과 조회수가 움직이는 구조에서 큰 변화가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있지 ⓒ데일리안DB
대중음악은 이러한 외모 평가에 맞서 자기긍정의 언어를 키워왔다. 있지(ITZY) ‘달라달라’, 화사는 ‘아이 러브 마이 바디’(I Love My Body), 아이들의 ‘알러지’(Allergy)와 ‘퀸카’(Queencard) 등 많은 곡들이 타인의 평가를 신경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체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노래들을 보면 대체로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도착점을 향한다.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몸을 바꾸는 데 실패한 데 이어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자책을 남기기 때문이다.
권진아는 이 지점에서 다른 문장을 선택했다. 그는 쇼케이스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자신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며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거나 사랑할 수 없더라도 내일로 가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날에도 삶은 계속된다. 권진아가 음악으로 건네는 위로는 당당해지라는 주문보다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고백이다. 여성 음악이 말하는 ‘나’의 범위가 자신감 넘치는 몸에서 아픈 몸으로, 완성된 자기애에서 흔들리는 자기혐오로 넓어질 때 더 많은 사람의 삶이 노래 안에 들어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