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 20장, 누군 0장…줄줄 새던 지원금 막은 블록체인
입력 2026.07.17 07:03
수정 2026.07.17 07:03
NFC 카드·생체인증으로 오프라인에서도 바우처 결제
DSRV, 마다가스카르 1000명 실증→9만5000명 확대 논의
에티오피아도 디지털 신원으로 농민 금융 사각지대 해소
DSRV와 에티오피아가 블록체인을 활용해 인터넷과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농민 지원금 부정수급을 막고 금융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데일리인 김민희 기자
“한 사람은 바우처를 10장, 20장씩 받는데 정작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단 한 장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신분증과 금융·결제 인프라가 부족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정부가 농민 지원금을 마련해도 누구에게 전달됐고 어디에 사용됐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수급자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중복 수령과 부정수급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갈 우려가 있던 농민 지원금에 블록체인이 ‘디지털 장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생체인증으로 지원 대상자를 확인하고 사용 내역을 블록체인에 기록해 동일인이 바우처를 여러 차례 받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
17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 DSRV는 세계은행과 함께 마다가스카르에서 블록체인 기반 농업 전자바우처 시스템을 실증했다.
마다가스카르는 전체 인구의 약 80%가 농업에 종사하며, 은행 계좌가 없는 인구도 80%에 이른다.
인터넷 보급률은 약 20%에 불과하고 통신이 자주 끊기는 농촌 지역도 많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정부가 농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려 해도 첫 단계인 본인 확인부터 쉽지 않다.
신분증이 없거나 신원 정보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주민이 많아서다.
따라서 한 사람이 여러 명인 것처럼 등록해 바우처를 중복으로 받더라도 이를 가려내기 어렵다.
반대로 지원 대상에 포함돼야 할 농민이 신원을 증명하지 못해 바우처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지원금이 실제 농업 생산을 위해 사용됐는지 추적할 결제망 역시 부족하다.
그렇다고 종이 바우처를 모바일 바우처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스마트폰을 가진 농민이 많지 않은 데다 스마트폰이 있어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는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 끊겨도 결제…생체인증으로 중복 수령 차단
DSRV는 생체인증과 근거리무선통신(NFC) 카드를 결합해 이 같은 허점을 보완했다.
먼저 농민의 생체정보를 등록해 바우처를 사용하는 사람이 실제 수급 대상자인지 확인했다.
농민의 신원과 생체정보는 현지 데이터센터에 보관하고, 등록 정보와 이용자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해시값만 블록체인에 기록했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블록체인에 직접 저장하지 않으면서도 동일인이 여러 차례 등록하거나 바우처를 중복으로 받는 것을 걸러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농민에게는 NFC 카드를 지급했다.
카드를 단말기에 갖다 대고 생체인증을 거치면 바우처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은행 계좌,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없어도 이용할 수 있으며, 인터넷이 끊겨도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게다가 오프라인에서 발생한 거래 내역을 NFC 카드나 스마트폰의 보안 영역에 우선 저장한 뒤 15분마다 네트워크와 동기화하도록 설계했다.
통신 환경이 불안정한 농촌에서도 바우처를 사용하고 그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거래 내역은 이더리움 레이어2 네트워크에 기록된다.
약 1년간 진행된 실증은 후속 사업 논의로 이어졌다.
DSRV는 1000명을 대상으로 구축한 전자바우처 시스템을 9만5000명 규모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DSRV와 에티오피아가 블록체인을 활용해 인터넷과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농민 지원금 부정수급을 막고 금융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데일리안 김민희 기자
신분증 없는 농민도 금융권으로…에티오피아의 실험
블록체인을 활용해 정부 지원금과 금융 서비스의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는 마다가스카르에 그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는 약 4700만명이 등록한 국가 디지털 신원 ‘파이다(Fayda)’를 운영하고 있다.
국민뿐 아니라 합법적 거주자와 외국인, 난민도 등록할 수 있으며 이용자에게는 평생 유지되는 고유번호가 부여된다.
파이다는 정부와 민간을 아우르는 150개 이상의 기관과 연계돼 하루 약 200만건의 신원 인증을 처리하고 있다.
이용자는 실물 카드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뿐 아니라 종이에 인쇄한 QR코드로도 신원을 증명할 수 있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QR코드나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지갑을 활용해 오프라인으로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가 디지털 신원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는 것은 단순히 기존 신분증을 디지털 형태로 바꾸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공식 신분증이 없으면 은행은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고, 주민들은 계좌를 개설하지 못해 금융거래 이력을 쌓을 수 없다.
이에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토지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경제활동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해 대출이나 보험 등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구조다.
에티오피아는 이 연결고리를 디지털 신원으로 풀겠다는 구상이다.
파이다에 농민의 신원과 경작지 정보를 연계해 누가 어느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지 확인하고, 이를 정부 지원과 금융 서비스 제공에 활용할 계획이다.
정부 지원금이 실제 대상자에게 전달됐는지 확인하는 한편, 금융거래 이력이 부족한 농민에게는 신용을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이를 통해 약 1800만명의 농민이 대출과 보험 등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마다가스카르와 에티오피아의 사례는 아프리카 농촌의 지원금 문제가 단순히 예산 부족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원 대상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지급된 자금의 사용처를 기록·추적할 수 있는 기반이 부족했던 것도 지원금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원인이었다.
블록체인은 이처럼 지원금 지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와 관리의 공백을 메우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블록체인은 코인을 사고파는 투자 기술을 넘어 지원금이 필요한 농민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한정된 재원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돕는 ‘디지털 장부’로 자리 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