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의 오래된 숨결 [조남대의 은퇴일기(102)]
입력 2026.06.30 14:01
수정 2026.06.30 14:01
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된 지평양조장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대다. 어제의 이름난 기업이 오늘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오래된 간판과 전통만으로는 더는 생존의 이유가 되지 못하지만, 어떤 것은 오래 살아남는다.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 지평리에서 조용히 술을 빚어오던 지평양조장이 그렇다. 긴 세월 마을의 풍경처럼 머물러 있던 양조장은 이제 좁은 울타리를 넘어 전국의 술상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 세계인의 입맛까지 두드린다.
지평역을 지나 나지막한 지붕들 사이를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춰 선 듯한 건물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1925년에 세워진 지평양조장이다. 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건물은 박제된 유산이라기보다 여전히 숨을 쉬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오래된 공장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제 역할을 잃고 폐허처럼 방치되기 일수다. 살아남더라도 소비를 위한 전시 공간으로 변해 본래의 모습을 잃기 쉽다. 그러나 지평양조장 안으로 들어서면 코끝을 감싸는 특유의 향이 있다. 한 세기에 걸쳐 벽체에 밴 누룩 향과 오래된 목조의 마른나무 내음이 뒤섞인 공기다. 높게 올린 천장과 벽체 사이를 메운 왕겨는 술이 익어가는 온도를 오랫동안 지켜냈다. 그 열기는 단순히 술을 만드는 온도가 아니라, 한 세대를 먹여 살리고 가문을 이어온 체온이었다.
지평양조장 초기 공장 전경 ⓒ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몽클라르 장군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지평리 전투를 지휘했던 공간이고,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전세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장군의 좁은 집무실과 나무 책상, 의자는 지금도 그날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양조장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안에 서 있으면 마치 백 년 전의 공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술을 빚던 공간이 생사를 가르는 전쟁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세월은 건물을 낡게 했지만, 벽과 기둥에 밴 근원적인 냄새만큼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평양조장은 단순히 보존된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시간을 발효시키며 살아 있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지평리 전투를 지휘했던 몽클라르 장군의 지평양조장 내 집무실 ⓒ
전통이라는 말은 때로 위험하다.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회사가 사라진 이유는 전통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 아닐까. 지평막걸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어떤 것이 남고 사라지느냐의 답은 '변화'에 있었다. 지평은 과거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냈다. 양평은 수도권의 젖줄인 상수원보호구역이다. 맑은 물은 막걸리의 생명이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환경 규제는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다. 전국에서 지평막걸리를 찾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낡은 양조장의 설비와 지역적 한계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생산 시설만 옮길 뿐, 술을 만드는 정신과 맛과 향은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평주조 춘천 2공장 ⓒ
2017년 강원도 춘천에 연구시설과 자동화 설비를 갖춘 제2공장을 세워 손맛의 감각을 데이터화했다. 또한 2023년에는 충남 천안에 거대한 첨단기술 양조장을 세워 시간당 3만 병을 쏟아내는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를 구축했다. 이를 보고 "이제 진짜 지평 술이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전통은 변화하지 않으며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될지도 모른다고. 물처럼 흘러야 오래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고집만 남으면 삶도 굳어진다.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종’이라는 진화의 법칙은 막걸리 한 잔에도 스며 있다. 지평은 옛 방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옛 정신을 남긴 채 장소와 방법을 바꾸었을 뿐이다. 문 닫은 다른 양조장의 빈 굴뚝들이 과거의 영광만을 추억할 때, 지평은 초심을 잃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살아남은 것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 맞추는 것이리라.
지평주조, 초격차 막걸리 생산 ‘천안공장’ ⓒ
시음장에서 투박한 사발에 담긴 뽀얀 막걸리의 탄산이 톡 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현대식 발효 탱크의 숨결일 수도 있고, 100년 전 옹기 독에서 이어져 온 시간의 울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잔이 사람과 사람, 시간과 시간을 이어준다는 점이다. 막걸리는 본래 공동체의 술이었다. 농사 중 허기를 달래주던 새참이었고, 장터에서 낯선 이들과 정을 나누게 하던 위로였다. 오늘날 지평막걸리가 한국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도 판매의 확장뿐 아니라, 한국인의 삶과 입맛을 다음 세대로 잇는 일처럼 느껴진다. 2014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복원 과정을 거쳐 2025년 전시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술보다 먼저 백 년의 시간을 마주한다. 비록 술 빚는 일은 멈췄어도 양조장에 밴 시간의 숨결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평양조장 시음장에서 막걸리를 시음하는 방문객 ⓒ
지평막걸리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거창한 전략보다 4대에 걸쳐 술 빚는 일에 묵묵히 마음을 쏟아온 시간에 있을 것이다. 술에서 끝내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된 가게와 골목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시대에 지평은 드물게 남아 있는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양조장은 멈췄지만, 그 안에서 익어온 시간은 술병에 담겨 더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에는 1925년 어느 새벽의 숨결과 오늘의 활기, 그리고 미래를 향한 꿈이 함께 스며 있다. 술잔 속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백 년 전 한 장인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풍경이 변해도 좋은 술로 사람을 위로하고자 했던 마음만큼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평막걸리를 발표시켰던 독 ⓒ
백 년을 넘긴 지평양조장은 전통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에 가깝다. 과거를 고집하는 대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바꾸어 왔기에 오늘의 지평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사람의 삶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래 살아남는 힘은 낡음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만의 온기를 잃지 않는 데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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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