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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기적·감동’ 한국 축구의 최종전은 늘 드라마였다

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입력 2026.06.24 21:05
수정 2026.06.24 21:06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서 동점골 터뜨린 유상철. ⓒ 연합뉴스

또다시 운명의 시간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32강 진출이 걸린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한국 축구는 그동안 월드컵 무대서 단 한 번도 평탄한 대로를 걷지 않았다. 매 대회 때마다 지긋지긋한 ‘경우의 수’를 따져야 했고, 특히 16강 진출이 걸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는 온 국민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며 눈물샘을 자극했던 격정의 드라마를 펼쳤다.


때론 피를 흘리며 투혼을 발휘했고, 세계 축구를 깜짝 놀라게 만든 기적을 쏘아 올릴 때도 있었으며 그때마다 진한 감동의 스토리가 완성됐다.




1954 스위스 월드컵 : 헝가리·터키전을 통해 느낀 세계의 벽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대한민국은 맨땅에서 축구화를 매고 스위스로 향했다. 군용기를 얻어 타고 이틀이 넘는 시간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현지에 도착한 선수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당시 대회 방식은 조별리그 4개국 중 2개국과만 경기를 치르는 방식이었고, 최종전 상대는 터키였다.


1차전에서 당대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에 0-9로 대패한 뒤 마주한 터키전에서 선수들은 체력적,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0-7로 무릎을 꿇었다. 비록 점수 차는 참혹했으나, 국제 무대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고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끈기의 축구가 잉태한 눈물의 최종전이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 이탈리아를 몰아붙인 패기


32년이라는 긴 암흑기를 깨고 다시 밟은 1986년 멕시코 무대. 아르헨티나,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점을 따내기 위해 분전한 김정남호의 최종전 상대는 '빗장수비'의 대명사이자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한국은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에게 멀티골을 내주는 등 고전했으나, 최순호의 대포알 같은 추격골과 허정무의 육탄전 끝에 터진 만회골로 이탈리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최종 결과는 2-3 석패.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고 난타전을 벌인 이 경기는 한국 축구도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이정표를 세웠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 우루과이전, 경기 종료 직전 깨진 승점의 꿈


이회택 감독이 이끌던 1990년 대표팀은 아시아 예선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본선 무대는 달랐다. 벨기에와 스페인에 연패한 뒤 맞이한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에서 선수들은 첫 승점이라는 목표를 위해 수비 라인을 내리고 육탄 방어를 펼쳤다.


전후반 내내 우루과이의 파상공세를 잘 막아내며 0-0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후반 45분, 단 한 번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다니엘폰세카에게 뼈아픈 헤더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무릎을 꿇었다.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 아쉬움과 함께 세계 축구의 높은 벽과 경기 막판 집중력 저하라는 고질병을 뼈저리게 통감한 순간이었다.




1994 미국 월드컵 : 폭염 속 전차군단을 놀라게 한 추격전


스페인전(2-2 무), 볼리비아전(0-0 무)을 거치며 승점 2를 확보한 대표팀의 최종 상대는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달라스의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치러진 전반전에서 한국은 위르겐 클린스만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는 등 순식간에 0-3으로 뒤처지며 대패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후반 들어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반격이 시작됐다. 후반 7분, 홍명보가 아크 정면에서 때린 강력한 중거리 슈팅이 독일 골망을 흔들며 추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기세를 탄 한국은 후반 18분, 박정배의 패스를 받은 황선홍이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칩샷으로 두 번째 골을 터뜨렸다.


당황한 독일은 전원 수비로 돌아섰고, 더 이상의 골은 터지지 않았다. 비록 2-3으로 석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국 축구의 DNA를 증명한 명승부였다.




1998 프랑스 월드컵 : 감독 경질, 그리고 붕대 투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전은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비장하고 눈물겨운 무대였다. 멕시코와의 1차전서 하석주의 퇴장 등 1-3 역전패했고, 2차전 네덜란드전에서는 0-5라는 대패의 충격을 떠안았다. 급기야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 속에 선수단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벨기에와의 최종전에 나섰다.


사기는 바닥을 쳤고 모두가 벨기에의 대승을 점쳤다. 하지만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은 달랐다.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던 후반전, 수비수 이임생이 상대 축구화에 맞아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임생은 교체를 거부하고 머리에 흰색 압박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피가 배어 나오는 투혼으로 그라운드에 다시 뛰어들었다.


이 붕대 투혼은 동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후반 26분, 하석주의 자로 잰 듯한 프리킥을 유상철이 슬라이딩하며 오른발을 갖다 대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냈다. 온몸을 던진 육탄 방어 끝에 거둔 1-1 무승부. 16강은 좌절됐지만 이때의 투혼과 감동은 여전히 축구 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포르투갈전 결승골 넣은 박지성. ⓒ 연합뉴스

2002 한일 월드컵 : 박지성의 가슴 트래핑, 포르투갈 침몰


안방에서 열린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폴란드전 첫 승(2-0)과 미국전 무승부(1-1)로 승점 4를 챙긴 상태였다. 최종전 상대는 루이스 피구, 주앙 핀투 등 황금세대가 버틴 포르투갈이었고, 패한 팀은 그대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단두대 매치였다.


인천을 가득 채운 붉은 악마의 함성 속에서 선수들은 포르투갈의 공격을 강한 압박으로 지워버렸다. 상대의 거친 플레이로 주앙 핀투와 베투가 잇따라 퇴장당하며 수적 우위를 점한 한국은 후반 25분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영표가 왼쪽 측면에서 길게 올려준 크로스를 반대편에 있던 박지성이 오른발 가슴 트래핑으로 수비수를 따돌린 뒤, 왼발 발리 슈팅으로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뚫어냈다. 이 한 방으로 한국은 조 1위를 차지했고, 포르투갈은 짐을 쌌다.




2006 독일 월드컵 : 스위스전, FIFA 홈페이지를 마비시킨 분노


토고전 역전승(2-1), 프랑스전 기적 같은 무승부(1-1)로 원정 첫 16강 진출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스위스와의 최종전은 분노로 남은 잔혹사가 됐다.


0-1로 뒤진 후반전, 한국이 총공세를 펼치던 와중에 논란의 장면이 터졌다. 스위스의 공격 상황에서 패스가 연결될 당시, 알렉산더 프라이는 명백한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었다. 부심 역시 즉각 깃발을 들어 오프사이드를 선언했다. 한국 수비진이 부심의 신호를 보고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춘 사이, 프라이는 공을 밀어 넣어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호라시오 엘리존도 주심은 한국 수비수의 발을 맞고 굴절되었다는 이유로 부심의 판정을 번복하고 그대로 골을 인정했다. 0-2 패배. 원정 최초 승점 4를 따내고도 조 3위로 탈락한 비운의 순간이었다.


경기 후 분노에 휩싸인 국내 네티즌들은 재경기를 요구하기 위해 FIFA 공식 홈페이지로 몰려가 폭발적인 트래픽을 유발했고, 결국 FIFA 서버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FIFA는 역사상 유례없는 '한국 네티즌 접속 차단'이라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판정 아쉬움에 눈물을 삼켜야 했던 억울한 최종전이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 천운이 도운 수준 낮은 공방전


나이지리아와의 최종전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천운'이 따랐던 경기다. 그리스전 승리(2-0)와 아르헨티나전 대패(1-4)를 겪은 허정무호는 나이지리아와 비기기만 해도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잡아준다는 전제하에 16강에 갈 수 있는 경우의 수에 직면했다.


경기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였다. 전반 초반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으나, 이정수의 동점골과 박주영의 프리킥 역전골이 터지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경기 자체는 양 팀 모두 수비 조직력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낸, 수준 낮은 경기였다. 특히 후반전 나이지리아 공격수 야쿠부는 골문 바로 앞에서 공을 허공으로 날려버린 역대급 실수를 범했고, 연이은 득점 기회를 무산시켜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결국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꺾어주면서 원정 역사상 첫 16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 알제리 쇼크의 여파, 월드컵은 증명하는 자리


러시아와의 1차전(1-1 무)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홍명보호의 분위기는 2차전 알제리전(2-4 패)에서 처참하게 부서졌다. 전반전에만 3골을 얻어맞으며 전술적, 멘탈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팀 분위기는 고스란히 벨기에와의 최종전으로 이어졌다.


이미 16강 자력 진출 자력은 사라진 상태. 한국은 벨기에의 퇴장으로 전반 막판부터 수적 우위를 점했으나 공격은 무기력했다. 오히려 후반 33분 얀 베르통언에게 결승골을 헌납하며 0-1로 허망하게 패했다. 종료 휘슬이 울린 후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이영표 해설위원은 무기력한 플레이와 준비 부족을 꼬집으며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월드컵은 증명하는 자리에요”라는 명언을 남겼다.


카잔의 기적 완성한 손흥민. ⓒ KFA

2018 러시아 월드컵 : 카잔의 기적, 세계 1위 독일의 침몰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최종전은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반전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힌다.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은 스웨덴(0-1 패), 멕시코(1-2 패)에 연패하며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상대는 FIFA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독일.


하지만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은 독기를 품고 뛰었다. 골키퍼 조현우는 마누엘 노이어 못지않은 신들린 슈퍼세이브로 독일의 파상공세를 막아냈다. 0-0의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던 후반 추가시간,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코너킥 상황에서 토니 크로스의 발을 맞고 흐른 공을 김영권이 침착하게 밀어 넣었다. 최초 부심의 깃발이 올라갔으나 VAR 판독 결과 골로 인정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당황한 독일은 골키퍼 노이어까지 공격에 가담하며 전원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주세종이 노이어의 공을 빼앗아 전방으로 길게 찔러줬고, 이를 전력 질주한 손흥민이 빈 골대에 가볍게 밀어 넣으며 2-0 대승의 마침표를 찍었다. 전 세계 외신은 이 경기를 헤드라인으로 장식하고 ‘카잔의 기적’은 투혼과 기적이 결합한 최고의 명승부로 각인됐다.




2022 카타르 월드컵 : 알 라이얀의 기적, 황희찬의 극장포


2022년 카타르에서도 다시 한번 기적이 연출됐다. 우루과이전(0-0 무), 가나전(2-3 패)을 거치며 승점 1만 확보한 상황에서 가나전 퇴장 여파로 벤투 감독이 관중석에서 포르투갈전을 지켜봐야 했다.


전반 초반 히카르두 오르타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꼬이는 듯했다. 그러나 전반 27분, 코너킥 상황에서 이강인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등을 맞고 굴절되었고, 이를 김영권이 넘어지며 발리 슈팅으로 연결해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파상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버틴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이 마스크 투혼을 발휘하며 상대 진영까지 약 70m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상대 수비수 3명에게 둘러싸인 순간, 손흥민은 수비수 다리 사이로 절묘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쇄도해 들어가던 황희찬이 오른발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해 역전 극장골을 터뜨렸다.


2-1 승리로 끝난 후 선수들은 그라운드 한가운데 둥글게 모여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우루과이가 가나에 2-0으로 승리하면서 다득점에서 앞선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된 순간, 선수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경우의 수를 뚫고 완성한 감동적인 '알 라이얀의 기적'이었다.

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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