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배우, 세 개의 무대”…거친 날것의 독백 끝에 마주한 따뜻한 위로 [D:현장]
입력 2026.06.23 18:34
수정 2026.06.23 18:34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트리플캐스팅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단 10분짜리 독백으로 시작해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뒤흔들고, 웨스트엔드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거쳐 에미상과 골든글로브까지 휩쓴 히트작이 마침내 한국 무대에 상륙했다. 정형화된 연극 문법을 깨부수며 현대인의 고독과 자기파괴적 욕망을 블랙코미디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로 풀어낸 여성 1인극, 연극 ‘플리백’(Fleabag)이 그 주인공이다.
원작자 피비 월러 브리지의 독창적인 서사와 거침없는 날것의 고백으로 전 세계 평단으로부터 “충격적일 만큼 웃기고 황홀할 만큼 매혹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 문제작은, 국내 상영(NT Live) 당시에도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며 라이선스 초연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린 바 있다.
ⓒ데일리안DB
제작을 총괄한 이길준 프로듀서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개최된 연극 ‘플리백’의 전막 시연 및 기자간담회에서 “어린이 공연을 해오다 성인 공연을 시작하면서 무대부터 조명까지 세 명의 배우에게 완전히 다른 세 개의 무대를 맞춤 제작하는 전무후무한 도전을 감행했다”며 포부를 밝혔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류주연 연출은 “문화적 충격을 안길 만큼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지만, 결국 밑바닥까지 속내를 드러냈을 때 마주하는 인간적인 휴머니티와 공감 포인트가 핵심인 작품”이라며 연출 방향을 짚었다.
이번 한국 초연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명의 배우에게 완전히 다른 무대 디자인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보통 세트는 고정한 채 배우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멀티캐스팅의 강점으로 꼽히는데, ‘플리백’은 배우마다 무대 세트, LED 배경, 조명 큐, 음향 디자인을 모두 따로 맞춤 제작하면서 더 강한 개성이 돋보이도록 했다.
이 프로듀서는 “배우마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정서가 다르다. 그들의 생각을 최대한 반영해 한 사람만을 위한 독자적인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계기를 밝혔다. 이어 “주변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며 재정적 낭비를 우려하기도 했다. 두산아트센터 대관료도 만만치 않은데 3주간 극장을 대관해 리허설과 테크니컬 연습을 진행했다. 대학로에서 이런 셋업을 시도한 팀은 전무후무할 것”이라며 잘 만든 작품을 향한 남다른 뚝심을 드러냈다.
류 연출 역시 “보면서 웃기는 것과 배우가 액팅으로 웃기는 것은 고도의 순발력이 필요한 어려운 영역이라 특별히 액팅 코치까지 뒀다”라며 “무대를 세 개로 제작해 하나의 공연을 올리는 제작팀은 처음일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블록버스터 연극의 일원으로서 함께할 수 있어 무척 재미있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 프로듀서 역시 “원작자 피비 월러 브리지는 자기가 쓰고 직접 연기해 생동감이 엄청났다. 타인이 그 결을 살리기가 쉽지 않아 배우들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무대 콘셉트를 직접 제시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전막 시연에서는 세 배우가 파트를 나눠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무대를 펼쳤다. 가장 먼저 무대를 선보인 김규남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장점과 의지할 수 있는 소품(의자들)을 섞어 영리하게 무대를 썼다. 인물의 즉흥성과 당찬 에너지가 돋보였다. 김규남은 “연극 무대가 8~9년 만이라 부담이 컸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며 깔깔대고 웃다가 이내 단순한 유쾌함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20대 초반에 남을 웃기려고 스스로를 깎아내렸던 내 평소 모습이 이입되어 큰 도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무대에 오른 김히어라는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에 가장 가깝게 무대를 꾸몄다. 빈 무대에 의자 하나만 두고 관객과 능수능란하게 소통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날 시연하진 않았지만 카메라를 활용해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표정을 대형 LED 화면으로 클로즈업하는 연출이 핵심이다. 김히어라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형식이라 한국 문화에 닿지 않을까 봐 번역 과정부터 심사숙고했다. 연습 때는 ‘이 수위 높은 대사를 정말 뱉을 수 있나’ 싶어 허벅지를 꼬집으며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마지막으로 김주연은 무대 위에 실제 카페 세트와 다양한 소품을 배치해 드라마성을 극대화했다. 카페 문을 닫는 날, 지난 사흘간 있었던 내밀한 사건들을 관객에게 조곤조곤 고백하는 서사적 형태다. 김주연은 “대본을 보고 ‘내가 과연 어떤 얼굴로 관객 앞에 서야 할까’ 상상조차 안 돼 악몽까지 꿨다”라며 “하지만 여성 원맨 코미디 극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내 인생에 언제 이런 작품을 해보겠나 싶어 용기를 냈다”고 전했다.
작품 속 대사들은 거침없는 성적 은어와 욕설이 쏟아지는 등 선정적이지만, 극이 마칠 때쯤엔 지독한 외로움과 인간적인 휴머니티라는 반전의 위로를 건넨다. 류 연출은 ‘지저분한 사람, 쓰레기’를 뜻하는 중의적 제목인 ‘플리백’에 대해 “가진 것 없고 미숙하여 모든 걸 망쳐버리는 26세 청춘을 주인공으로 세움으로써, 비슷한 처지의 외로운 젊은이들에게 ‘너 말고 우리가 있어’라며 손을 내미는 반어적 설정”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극 중 어른 캐릭터인 조의 역할에 대해 “젊은 날을 지나온 어른이 방황하는 청춘에게 ‘괜찮아, 집에 가서 좀 쉬어’라고 건네는 한마디가 이 작품의 핵심 길잡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창작진은 입을 모아 “‘플리백’은 최소 세 번을 봐야 한다. 세 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플리백이 다 다르고, 네 번째 플리백은 결국 극장을 나서는 관객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당부와 자부심을 전했다.
연극 ‘플리백’은 오는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