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못해도, 스타아니라도”…브로드웨이 뚫은 ‘한국 토종 록시’ 아이비 [D:현장]
입력 2026.06.23 13:45
수정 2026.06.23 13:45
8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뉴욕 앰버서더 극장서 공연
1년의 혹독한 오디션 뚫고 ‘시카고’ 록시 역 발탁
“메시지 잘 전달됐으면…‘낫 배드’ 평가만으로 만족”
“영어를 못해도, 저처럼 나이가 많아도, 스타가 아니어도 이런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분께 힘과 꿈과 용기를 드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상 ‘최다 록시 하트’이자, 국내에서만 무려 592회 ‘시카고’ 무대에 오른 독보적인 지분의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마침내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아이비는 23일 오전 충무아트센터에서 진행된 뮤지컬 ‘시카고’ 브로드웨이 진출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대한민국 뮤지컬 배우를 대표해서 가는 거라 책임감과 부담이 느껴지지만, 뮤지컬의 본고장은 어떻게 일하는지 호기심도 생기고, 설렌다”라며 출국을 앞둔 솔직한 소회를 밝혔다.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 역시 1년에 걸친 혹독했던 오디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한국 뮤지컬의 위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아이비의 브로드웨이 진출의 시작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명성 프로듀서는 뉴욕 프로덕션으로부터 아시아 배우 캐스팅 제안을 받았으나, 작품 특유의 은어와 언어적 장벽 탓에 “소화할 배우가 없다”며 거절했다.
반전은 재작년에 일어났다. 한국에서 무려 8시즌 동안 아이비의 기량을 지켜본 뉴욕 크리에이티브 팀이 그녀를 직접 추천하고 나선 것이다. 박 프로듀서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비에게 도전을 제안했다. 신시와 뉴욕 프로덕션, 그리고 아이비의 열정까지 ‘삼합’이 맞아떨어진 특별한 기회”라며 소회를 전했다.
뮤지컬 ‘시카고’는 1926년 실제 살인 사건의 기록을 바탕으로 탄생해,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오래 공연되고 있는 미국 뮤지컬이라는 대기록을 가진 명작이다. 1920년대 재즈풍의 넘버와 밥 포시 특유의 관능적인 안무를 통해, 살인마저 ‘쇼’가 되는 냉혹한 미디어 세상과 사법 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특히 올해는 ‘시카고’가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3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로, 전 세계 38개국에서 사랑받은 이 작품의 기념비적인 무대에 아이비가 당당히 주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아이비는 2012년 한국어 버전 초연 이래 단일 캐스트 공연을 포함해 14년간 록시 하트를 연기해 온 베테랑이다. 무대 정중앙 14인조 라이브 재즈 밴드 앞에서 오직 몸짓과 노래만으로 무대를 장악해야 하는 ‘시카고’의 미니멀리즘과 절제의 미학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체득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본토 브로드웨이의 벽은 높았고, 아이비는 지난 1년의 오디션 과정을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다고 고백했다. 3~4개월에 한 번씩 총 세 차례 진행된 영상 오디션은 매 순간이 고비였다. 그는 1차 오디션에서는 발음 지적을, 2차에서는 액센트 지적을 받으며 완벽하지 않다는 자책감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스스로 안 될 거라 결론 내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특히 미국에 머물던 중 갑자기 찍어 보내야 했던 마지막 3차 오디션에는 극적인 비하인드가 있었다. 클래식이 아닌 재즈 기반의 ‘시카고’ 넘버 특성상 전문 반주자 3명에게 연이어 거절을 당한 것이다. 돌고 돌아 친구가 다니는 교회의 집사님이 밤새 연습해 반주를 해줬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 오디션을 도왔던 오민영 음악감독이 “합격 못 하면 가만 안 둔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만큼 치열한 과정이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현재 아이비는 주중 내내 일반 학생보다 더 빽빽한 일정으로 영어 공부에 올인하고 있다. 영어 학원에서 프로젝트성으로 매칭해 준 9명의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비즈니스 영어를 배우고, 액팅을 전공한 보이스 액터 3명에게 대사와 연기 지도를 받으며 영어와 한국어의 발성 위치 차이까지 섬세하게 연구하고 있다.
아이비는 직접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의 ‘모두가 알게 될 이름, 그래 바로 록시’ 톤을 시연하며, “영어는 소리의 위치가 아래로 떨어지더라.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고, 현지에서 배운 뉘앙스를 나중에 한국 공연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눈을 반짝였다.
“밤에 자기 전 무대를 상상하면 숨이 확 막힐 정도로 두렵다”는 아이비는 미국 관객을 향해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100% 토종 한국인이라 모든 게 낯설고 두렵다. 발음이 완벽하진 않겠지만 관객들이 대사와 노래를 잘 알아듣고 메시지만 분명히 전달된다면 성공이다. ‘저 정도면 낫 배드’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겸손한 각오를 전했다.
16년간 한눈팔지 않고 작품에만 매진해 온 아이비를 향해 박명성 프로듀서는 “예술적 소양이 특출난, 요즘 보기 드문 예술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이제 한국 스태프와 배우들만으로 작품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진 지금, 아이비의 브로드웨이 진출을 계기로 더 많은 한국 배우가 세계 무대에 도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비는 다음 주 미국으로 출국해 오는 8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3주간 뉴욕 앰버서더 극장에서 총 24회에 걸쳐 브로드웨이 관객을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