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끝난 전쟁, 안 끝난 기름 불안…호르무즈가 남긴 에너지 안보 숙제 [석유를 읽다 下]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입력 2026.06.23 14:18
수정 2026.06.23 14:18

호르무즈 통항 정상화·재봉쇄 가능성 등 변수 여전

원유 수입 70% 중동 의존…도입선 다변화 필요성 부상

SK에너지 공급가 사전고지…가격 투명성 확대 주목

서울시내 주유소에 주유기가 놓여 있다.ⓒ뉴시스

미·이란 전쟁이 종전 국면에 들어섰지만 에너지 시장의 불안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종전 양해각서가 체결됐더라도 실제 이행을 위한 협상은 남아 있고 전쟁 과정에서 훼손된 정제시설과 항만 등 에너지 인프라가 정상화되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변수도 여전하다. 글로벌 원유 소비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이번 전쟁 기간 국제 에너지 시장의 핵심 불안 요인으로 떠올랐다. 해협 통항이 재개되더라도 선박 운항이 평시 수준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60일 한정 통행료 면제나 재봉쇄 가능성 같은 위협 요소도 남아 있다.


이번 사태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반세기 만에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웠다.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 우려만으로도 원유 수급 안정성이 흔들렸고 국제유가와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 변동폭이 커졌다. 종전은 끝이 아니라 한국 에너지 안보 수준을 다시 점검해야 하는 전환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이 곧바로 국내 에너지 수급과 도입 비용, 석유제품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유업계 안팎에서는 미주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으로 원유 수입선을 더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는 특정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내 경제 전반으로 번지는 충격을 줄이는 안전장치로 평가된다.


다만 도입선 변화는 단순한 수입처 전환이 아니다. 원유마다 황 함량과 밀도 등 성상이 다르고 국내 정제설비와의 적합성도 따져야 한다. 운송 거리와 장기계약 구조, 경제성까지 함께 검토해야 해 정유사 입장에서도 설비와 조달 전략을 동시에 조정해야 하는 과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도입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산 원유 도입 물량을 늘려왔으며 설비 전환 등 제반 요소들에 대한 다각적 검토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석유 의존도를 당장 낮추기는 어렵지만 신재생에너지와 수소,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전력망 고도화 등으로 에너지원을 다변화해야 수급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수급 대란 속 커진 정유업계 역할론


이번 전쟁 국면에서는 국내 정유업계의 역할도 다시 부각됐다. 국내 정유 4사는 글로벌 5위 수준의 정제 역량을 바탕으로 국내 석유제품 공급을 유지하고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에도 협조해왔다. 국제 제품가격과 환율, 운임, 보험료가 동시에 오르는 상황에서 내수 가격 급등 압력을 일부 완충한 것이다.


정유산업은 휘발유와 경유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항공유 공급이 흔들리면 항공 운항과 물류비가 영향을 받고, 경유 가격이 뛰면 화물 운송과 산업 현장의 비용 부담이 커진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항공, 물류 등 국가 주요 산업이 에너지 공급망과 연결돼 있는 만큼 정유산업의 안정성은 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된다.


수출 측면에서도 국내 정유사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한국은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뒤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을 해외에 공급하는 주요 수출국이다. 글로벌 에너지 수급이 흔들릴수록 한국 정유사들이 역내 부족 물량을 메우는 역할도 커질 수 있다.


실제로 뉴질랜드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달 SK에너지 본사를 방문해 한국산 석유제품 공급 협조를 요청했다. 지난해 뉴질랜드 석유제품 수입 시장에서 한국산 비중은 약 40.7%로 알려졌다. 미국도 한국산 항공유 공급 차질 방지 협조를 요청했으며 미국의 한국산 항공유 수입 비중은 68.6%에 달한다. 한국은 호주 최대 석유제품 공급국으로 전체 수입 시장의 약 29.1%를 차지한다.


투명한 가격체계, 정유업계 신뢰 회복 계기 될까


에너지 안보는 원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유가 급등락 때마다 국내 석유제품 가격에 대한 논란이 반복되는 만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가격 신뢰도 에너지 안보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유업계는 국내 판매가격이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환율, 세금, 유통비용, 재고 효과 등을 반영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다만 소비자가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공급 안정성과 함께 가격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SK에너지의 가격정책 변화도 주목된다. SK에너지는 정유 업계 최초로 최고가격제 시행 종료 이후 주유소 공급가격을 일주일 단위로 사전 고지하고 사후정산을 폐지하는 새로운 가격정책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동안 주유소 공급가격은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환율, 유통비용, 재고 상황 등이 반영되면서 사후 정산 구조로 운영돼 가격 예측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급가격이 사전에 고지되면 주유소도 판매가격을 보다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정할 수 있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가격 변동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SK에너지는 전쟁이나 금융위기처럼 시장 변동성이 급격히 커지는 상황에서는 별도 시장 대응 체계를 가동해 국내 석유제품 가격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최근 경유 공급가 인하와 주유소 유통망 지원, 원유 도입선 다변화 투자 확대 등도 같은 흐름에서 해석된다.


정유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가 국내 정유산업 전반의 가격 투명성과 시장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에너지 안보 경쟁력이 비축 물량이나 정제 능력뿐만 아니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가격 체계와 투명한 시장 운영 역량에서 판가름날 것"이라며 "SK에너지의 공급가격 사전고지 같은 소비자 신뢰 강화 노력이 정유업계 전반으로 확산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