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보다 값진 감동’ 카보베르데·퀴라소가 계승한 월드컵 언더독 전설
입력 2026.06.17 08:29
수정 2026.06.17 08:30
스페인을 상대로 0-0 무승부 선전을 펼치자 거리에서 기쁨을 만끽하는 카보베르데 국민들. ⓒ REUTERS=연합뉴스
전 세계인의 축제 FIFA 월드컵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강팀들의 우승 경쟁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는 승리보다 값진 패배가 있고, 트로피보다 더 큰 감동을 안기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번 북중미월드컵에서도 축구팬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 감동의 서사가 작성되고 있다. 축구 변방, 이름조차 생소한 카보베르데와 퀴라소가 그 주인공이다.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이들이 세계 축구의 강호들을 상대로 써 내려간 드라마는 세계인들이 왜 축구에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그 본질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카보베르데는 조별리그 첫 경기서 강력한 우승 후보 스페인을 맞아 육탄 방어 끝에 0-0 무승부의 대이변을 연출했다.
또 다른 첫 출전국 퀴라소 역시 전차군단 독일에 1-7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스코어판에 새겨진 패배의 얼룩은 중요하지 않았다. 축구팬들의 가슴을 울린 퀴라소의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7골을 내주고도 그들이 득점한 단 한 골에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선수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전 세계에 잔잔하면서 강렬한 감동을 안겼다.
과거에도 월드컵의 감동은 불가능에 도전했던 ‘위대한 언더독’에서 찾아왔다. 실제로 월드컵 역사에는 결과 이상의 의미를 남긴 데뷔 국가들이 적지 않았다.
퀴라소 팬들 또한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 AFP=연합뉴스
▲ 2002년 세네갈 :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 침몰시킨 사자들
월드컵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데뷔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2002 한일 월드컵의 개막전이 등장한다.
당시 프랑스는 1998년 자국 월드컵 우승, 유로 2000 우승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이었다. 지네딘 지단이 부상으로 빠졌으나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파트리크 비에라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건재했던 프랑스는 사상 처음으로 본선 진출권을 따낸 아프리카의 세네갈과 마주했다.
프랑스의 낙승, 아니 몇 골 차로 세네갈을 완파할 것인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충격과 전율의 도가니로 변했다. 프랑스 리그에서 뛰며 상대 선수들의 성향을 꿰뚫고 있던 세네갈 선수들은 위축됨 없이 거칠고 탄탄한 조직력으로 프랑스의 호화 미드필더진을 압박했다.
마침내 전반 30분, 엘 하디 디우프가 왼쪽 측면을 허문 뒤 찌른 크로스를 문전으로 쇄도하던 파파 부바 디오프가 슬라이딩하며 밀어 넣었다. 골이 터진 순간, 세네갈 선수들은 코너 플래그 주변에 유니폼을 벗어 던져놓고 춤을 추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당황한 프랑스는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세네갈의 육탄 방어와 골대를 맞히는 불운 속에 무릎을 꿇었다. 결과는 세네갈의 1-0 승. 세계 축구사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세네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별리그를 통과, 16강에서 스웨덴마저 꺾은 뒤 ‘첫 출전 8강 신화’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 2006년 앙골라 : 오랜 내전의 아픔을 치유한 감동의 승점 1
축구가 가진 사회적, 정치적 힘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도전기도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무대를 밟은 아프리카의 앙골라 이야기다.
앙골라는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무려 30년에 가까운 끔찍한 내전을 겪은 나라였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축구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졌을 리 만무했다. 잔디조차 제대로 깔리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 공을 차던 앙골라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전 세계 언론은 조별리그 3전 전패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했다.
하지만 독일 땅을 밟은 앙골라 선수들의 가슴 속에는 단순한 승패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바로 전쟁으로 찢겨진 조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첫 경기 상대는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전. 아쉽게도 결과는 0-1 패배였다. 그리고 이어진 2차전에서는 멕시코를 만나 골키퍼 주앙 리카르도의 신들린 선방과 온몸을 던지는 수비로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역사적인 월드컵 첫 승점을 따냈다. 마지막 이란전에서도 1-1 무승부를 거둔 앙골라는 2무 1패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값진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월드컵 기간 앙골라에서는 총성이 멈췄고 총칼을 내려놓은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한데 모여 낡은 TV 앞에 앉아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며 눈물을 흘렸다.
2018년 강력한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와 비긴 아이슬란드의 선전에는 팬들의 응원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다. ⓒ AP=뉴시스
▲ 2018년 아이슬란드 : ‘인구 33만의 소국’이 리오넬 메시를 발목 잡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첫 출전한 아이슬란드의 총 인구는 고작 33만 명. 이번 퀴라소(15만명)가 출전하기 전까지 월드컵 본선 진출팀 중 역대 최소 인구를 기록하던 아이슬란드였다.
더군다나 선수들 대부분이 이른 바 ‘투잡’을 뛰고 있는 독특한 이력을 지녀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대표팀을 이끄는 하이미르 할그림손 감독의 본업은 치과의사였고, 골문을 지키는 주전 골키퍼 하네스 할도르손은 광고 및 영화감독. 마찬가지로 다른 선수들 역시 과거 소금 공장에서 일했거나 축구 외에 다른 생업을 가졌던 이들이 수두룩했다.
이러한 ‘외인구단’ 아이슬란드의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리오넬 메시가 버티고 있는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였다.
예상대로 아르헨티나가 경기 주도권을 잡고 아이슬란드를 몰아쳤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선수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거대한 얼음벽을 연상케 하는 촘촘한 두 줄 수비로 메시에게 가는 길목을 철저히 차단했다. 선제골을 내준 아이슬란드는 곧바로 동점골을 터뜨렸고, 후반에는 PK를 내줬으나 메시의 슈팅을 영화감독 출신 골키퍼 할도르손이 막아내며 끝내 1-1 무승부를 일궜다.
종료 휘슬이 울린 뒤 경기장에는 아이슬란드서 러시아까지 건너온 자국팬들이 선수들과 하나 되어 웅장한 ‘바이킹 박수(Thunder Clap)’ 세리머니를 펼쳤다. 인구수와 선수들의 몸값이 축구의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 장면이었다.
2026 북중미월드컵에서 카보베르데와 퀴라소가 보여준 모습도 마찬가지다. 월드컵은 강자의 역사로 기록되나 팬들의 기억 속에는 우승국 못지않게 이름 없는 도전자들의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세네갈의 기적, 앙골라의 희망, 아이슬란드의 도전, 그리고 이번 카보베르데와 퀴라소의 감동까지, 그래서 월드컵은 전 세계가 함께 울고 웃는 축제의 장으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