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우방도 없다…해운·조선·항만 강한 한국의 선택은 [판 뒤집힌 물류망④]
입력 2026.06.13 06:00
수정 2026.06.13 06:00
중동전쟁에 글로벌 물류 질서 구조적 변화
효율성 넘어 안정성 중요 요소로 고려
특정 국가 중심 탈피, 복수 네트워크 필요
IMEC 등 다양한 신시장 개척이 경쟁력
부산 남구 신선대 부두 야적장에 수출입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다. ⓒ뉴시스
미국과 이란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세계 물류 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촉발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근본적인 재편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효율성이 물류의 핵심 가치였다면 이제는 안정성과 회복력, 그리고 전략적 자율성이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세계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에 더욱 큰 의미로 작용한다. 수출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는 국가 물동량 98%를 해상 운송에 의존하고 있다. 원유와 가스, 철광석 등 주요 원자재를 해외에서 들여오고 자동차와 반도체, 배터리, 석유화학 제품 등을 전 세계로 수출하는 구조다. 물류망의 변화는 곧 국가 경쟁력의 변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기존의 추격형 전략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양 물류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 글로벌 해운산업은 세 가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맞고 있다. 첫 번째는 공급망 재편이다. 미·중 갈등과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기업들은 특정 국가나 특정 항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구축했던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안보와 지정학적 위험(리스크)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두 번째는 친환경 전환이다. 국제해사기구(IMO)를 중심으로 해운업계의 탄소중립 요구가 강화되면서 선박 연료와 운항 방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 중유 중심 선박에서 LNG와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 친환경 연료 기반 선박으로의 전환이 본격화하고 있다.
세 번째는 디지털 전환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한 스마트 해운과 스마트 항만 구축이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순히 선박을 많이 보유하는 시대를 넘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물류 흐름을 최적화하는 국가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산업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다. 친환경 선박과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도 글로벌 선두권이다. 또한 세계적인 해운기업과 대형 항만 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해양산업 전반의 경쟁력 역시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강점을 새로운 질서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특히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대응 능력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무역 구조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시장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장기화하고 국제정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위험 요소다.
따라서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신흥시장과의 교역 확대를 통해 무역 구조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공급망 역시 특정 국가 중심이 아닌 복수의 거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국제 규범 경쟁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과거 한국은 국제 규칙을 따르는 국가였다면 앞으로는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1일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공격을 받은 태국 선적 컨테이너선 마유리 나리호가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다. ⓒ AFP/연합뉴스
친환경·디지털 향후 해운산업 경쟁구도 좌우
특히 IMO를 중심으로 하는 탄소 규제와 친환경 선박 기준, 디지털 항만 규범 등은 향후 세계 해운산업의 경쟁 구도를 좌우할 핵심 요소다.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산업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한국 역시 국제 해사 규범 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새로운 해상교통로 개척도 중요한 과제다. 최근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감소하면서 북극항로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아시아와 유럽 간 운송 거리는 기존 수에즈 운하 경로보다 크게 단축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기반 시설과 안전성, 국제법적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다만 세계 주요 국가들이 이미 북극항로 선점을 위한 경쟁에 나선 만큼 한국도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다.
국내 항만 개발 전략 역시 변화가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항만은 단순한 화물 처리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물류와 제조, 에너지, 데이터가 결합하는 복합 플랫폼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부산항을 비롯한 국내 주요 항만 역시 단순 환적 중심에서 벗어나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나아가 북극항로와 연결되는 미래 물류 네트워크의 중심축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중장기 계획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시대를 ‘해양 패권 경쟁의 시대’로 규정한다. 과거 국가 경쟁력이 영토와 인구, 군사력으로 결정됐다면 이제는 누가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물류 흐름을 주도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미·중 갈등과 중동 전쟁은 한국에 위기이자 기회다. 공급망 불안과 지정학적 충돌은 수출 의존 국가인 한국에 적지 않은 부담인 건 분명하다. 반대로 해운과 조선, 항만이라는 세계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물류 질서의 중심 국가로 도약할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전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분명하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국가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경쟁력뿐이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4월 보고서를 통해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산업연구원은 “기업은 단기적 용선 계약·대체 조달·비축량 조정 등에 그치지 말고, 기존 해상운송로를 상수로 둔 수출입 전략을 미래 대체 경로까지 고려한 장기 전략으로 수정하고, 글로벌 생산 포트폴리오 및 거점 재설계까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산업연구원은 “과거 효율성 중심으로 관리되어 온 에너지·물류 경로가 다각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안보·경색 리스크까지 포함한 새로운 최적화를 정부와 기업에 요구하는 상황이 됐다”며 “IMEC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외 신시장 개척 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