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이 남긴 것들] 신뢰 잃은 민주주의 파수꾼…선관위, 존폐 걸린 '쇄신론' 직면
입력 2026.06.06 07:00
수정 2026.06.06 07:00
용지 부족 사태 일파만파…'해체론'까지 거론
소쿠리 투표·특혜 채용·북한 해킹…불신 누적
노태악 위원장·허철훈 사무총장 동반 사퇴
여야 국조 한목소리…체질 개선 압박 본격화
4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과천청사 앞에서 열린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항의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6·3 지방선거 당일 서울·인천·경기 화성 등 일부 투표소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마감 시간 이후에도 투표가 진행되고 일부 시민들은 끝내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 책임론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결국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이 동반 사퇴하며 책임지는 모양새가 만들어졌지만, 일각에서는 '쇄신론'을 넘어 '해체론'까지 거론되고 있다. 헌법기관인 선관위의 존폐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국민의힘의 한 의원은 5일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이건 단순히 투표용지 한두 장 모자란 문제가 아니다. 유권자가 끝내 투표를 못 하고 발길을 돌렸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라며 "선관위가 60년 넘게 쌓아온 신뢰를 단 하루 만에 무너뜨린 셈"이라고 짚었다. 이 의원은 "이번에도 사무총장 한 명, 위원장 한 명 사퇴로 끝낸다면 4년 뒤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관위 책임론이 폭발적 양상을 보이는 배경에는 누적된 불신이 있다. 단순한 행정 실수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 사전투표에서 빚어진 이른바 '소쿠리 투표' 사태, 전·현직 사무총장과 간부들이 연루된 자녀·친인척 특혜 채용 의혹, 북한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이버 보안 부실, 사전투표소 몰래카메라 설치 사건 등이 잇따라 터졌다. 그때마다 선관위는 대국민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결국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당장 정치권은 강도 높은 책임 추궁에 나섰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투표함이 옮겨진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개표소를 직접 찾아 "시민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고 외쳤다. 장 대표는 같은 날 페이스북에 "투표용지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을 파괴한 것이고 그 자체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며 "노태악 선관위원장과 사무총장, 선관위원 전원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 이를 거부할 경우 우리 당은 즉각 탄핵을 추진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장 대표는 또 "선관위 개혁은 스스로의 손에 맡길 수준을 넘어섰다"며 국회 차원의 '선관위 개혁 특위' 구성을 촉구했다. 그는 "민주당이 진상 조사와 선관위 개혁을 방해한다면 스스로 선관위의 공범임을 자백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조속한 국정조사와 특검 추진도 요구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도 같은 날 원내대표 사의 표명 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더불어민주당에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관한 긴급 국정조사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송 전 원내대표는 "비공식 루트를 통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즉각 구성하자는 부분과 선관위 사무총장의 즉각 사퇴에 대해서도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국정조사 압박에 가세했다. 이 대표는 "민주당이 국정조사 요구를 질질 끌면서 안 받을 경우, 특검하자는 이야기가 폭발할 수도 있다"며 "야권은 민주당이 오늘 내로 국정조사 요구를 안 받으면 특검으로 격상해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야권에서 전방위적인 압박이 이어지자, 그동안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여당도 결국 국정조사 추진에 동참 의사를 밝혔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이해도 납득도 가지 않고 황당하다"며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선관위원장과 사무총장이 사퇴했지만 국정조사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 원내대표는 "대한민국을 사람들이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 하나가 발전된 민주주의이고, 선관위 시스템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고 중동에서는 이것을 배우려 한다"며 "이렇게 발전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투표지 부족이라는 부끄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 원내대표는 "근본적으로 선관위에 문제 있는 것까지 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며 "이번 기회에 선관위가 국민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개혁을 추진하고 진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투표용지가 부족한 것을 부정선거로까지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 진실을 명확히 규명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야가 국정조사 추진에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가운데, 야당에서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독립성과 비대함을 정조준하며 전면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소쿠리 투표에서도 문제가 벌어졌는데 반성하지 않고 또 이런 행동을 하는 선관위를 그냥 두면 안 된다"며 "선거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굉장히 중요하고, 이번 일을 통해 그런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선관위는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감사를 받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정치권이 논의해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며 "선관위의 근본적인 채용 시스템까지 다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책임의 범위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이 '이건 선관위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한 건 좀 무책임하다고 본다. 작은 문제도 이재명 대통령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느냐"며 "선관위 이 중요한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 논의해 제도 개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과천청사에서 대국민 사과문 발표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뉴시스
선관위 책임론의 근저에는 견제받지 않는 헌법기관이라는 구조적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2023년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졌을 때 감사원이 직무감찰에 나섰지만,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감사를 거부했다. 양측이 헌법재판소에서 권한쟁의심판을 벌인 결과 헌재는 2025년 2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감사원의 위헌·위법 직무감찰이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며 선관위 손을 들어줬다. 채용 비리에 대한 책임은 박찬진 당시 사무총장과 송봉섭 당시 차장의 사퇴 선에서 마무리됐고, 구조적 개혁은 사실상 손도 대지 못했다.
당내 다른 의원은 "선관위가 그동안 '독립기구'라는 방패 뒤에 숨어 어떤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이런 부실이 누적된 것"이라며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감사도 안 받고, 채용 비리가 터져도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끝이었다. 이번에는 그 방패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2022년 대선 사전투표 당시 코로나19 확진자 투표용지가 종이상자·비닐봉투·플라스틱 소쿠리 등에 담겨 옮겨진 '소쿠리 투표' 사태로 김세환 당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먼저 사의를 표명했고, 노정희 당시 선관위원장도 6월 지방선거 관리를 명분으로 잠시 사퇴를 거부하다가 결국 한 달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4년 뒤 또다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반복됐다. "재발 방지를 약속해놓고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여기에 북한 해킹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실까지 더해지며 선관위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2023년 10월 국가정보원·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선관위와 합동으로 진행한 보안 점검 결과 투·개표 시스템에서 다수의 해킹 취약점이 발견됐다.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 시민이 사전투표소 41곳에 무단으로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사건까지 적발되며 보안 관리 부실 논란이 또다시 일었다. 보안 부실 문제가 거듭 노출되면서 '부정선거론'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누적됐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선관위 측은 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아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정치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송 원내대표는 "투표율이 훨씬 더 높은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예산 체계상 유권자 숫자에 알파를 더한 만큼 투표지를 인쇄할 수 있는 예산이 이미 반영돼 있는데 그 예산이 어디로 갔느냐"고 따져 물었다.
결국 노 위원장은 5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저 역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노 위원장은 "참정권이라는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침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가능한 신속하게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철훈 사무총장도 같은 날 사의를 표명했다.
노 위원장은 2022년 '소쿠리 투표' 논란으로 노정희 전 위원장이 물러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4년 동안 자녀 특혜 채용, 사전투표 관리 부실 등으로 네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거듭했지만, 결국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자신마저 물러나게 된 것이다.
다만 위원장과 사무총장의 사퇴로 선관위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은 외부 통제 강화·감사원 감사 범위 확대·인사 구조 개편 등 구조적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헌법기관 특성상 강제 해체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국회 차원의 선관위 개혁 입법 움직임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통령도 "문제 발생 요인을 명확히 밝히고 명확하게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한 만큼, 여야 모두 선관위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선관위는 1963년 헌법기관으로 출범한 이후 60여 년간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축으로 기능해왔지만, 누적된 부실과 비리,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까지 겹치면서 '민주주의 파수꾼'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며 "결국 6·3 지방선거가 남긴 가장 무거운 숙제는 선관위의 신뢰 회복일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