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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테마섹' 20조원 청사진…소문만 무성한 국부펀드 [세종 백브리프]

배군득 기자 (lob13@dailian.co.kr)
입력 2026.06.05 10:29
수정 2026.06.05 10:29

초과세수로 미래 국부?…‘정치 외풍 격리’ 없는 위험한 출발

정부 진화에도 재원 가변성·펀드 중복 등 리스크 산적

펀드 출범보다 ‘정치로부터의 격리’ 설계가 우선돼야

정부가 20조원 규모의 한국형 국부펀드 구상을 내놨지만 재원과 운용 방식, 기존 정책펀드와의 역할 분담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펀드 출범보다 정치적 독립성과 손실 책임 구조를 먼저 확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정부가 국부펀드 설립 논란을 두고 잇따라 선을 그었다. 재정경제부는 지난달 31일 상장주식 물납 허용 여부와 재원조달 방안이 ‘전혀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고, 기획예산처도 지난 2일 명칭·재원·운용 규모 등 세부 설립 방안이 ‘현 단계에서 정해진 바 없다’고 해명했다. 정책 당국의 공식 입장은 한마디로 모든 가능성이 열린 ‘미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지난 1월 경제성장전략에서 초기 자본금 20조원 규모의 ‘한국형 국부펀드’ 조성을 대외적으로 명시했다. 당시 청사진에는 정부출자주식과 상속세 등으로 물납된 주식의 현물출자, 지분취득 방식을 병행해 재원을 마련하고 추가 조달 방안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맥락으로 볼 때 최근 정부의 해명은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철회 보다는 ‘큰 그림은 있되 세밀한 부분이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진도 보고에 가깝다. 이는 자본시장과 정치권에서 초과세수 활용설과 ‘20조원+α’ 조성설이 과열된 데 대한 속도 조절인 셈이다.


‘국민성장펀드’가 있는데 또?…중복투자의 그림자


대규모 국부펀드의 표면적 명분은 분명하다. 국가가 보유한 유휴 자산과 유동성 재원을 장기 자본시장에 투자해 지속 가능한 수익을 내고, 이를 미래 성장 재원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소모성 재정지출에서 벗어나 국가 자산을 굴려 미래 세대의 국부를 일군다는 논리는, 고령화와 산업전환 비용, 재정수요 확대가 겹친 한국에서 정치적 소구력이 크다.


관건은 정체성 혼란이다. 이 기구가 상업적 수익률 극대화를 노리는 순수 투자기구인지, 전략산업을 막후 지원하는 정책금융 수단인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성격 규정에 따라 자금 조달 방식, 운용 원칙, 부실 시 손실 책임의 주체가 통째로 달라진다. 더구나 한국 금융시장에는 이미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의 대규모 지원, 모태펀드, 각종 산업·성장펀드 등 정부 주도 자금공급 채널이 촘촘하다.


국민성장펀드와 신설 국부펀드가 모두 첨단전략산업 투자에 집중할 경우 정부 자금 간 중복투자가 발생할 수 있다. 수익형 투자기구와 정책금융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특히 운용 중인 ‘국민성장펀드’와의 영역 중복이 뇌관이다. 국민성장펀드는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로봇 등 첨단전략산업 생태계 지원 성격이 강하다.


신설 국부펀드가 장기 수익률 제고 대신 비슷한 첨단산업으로 방향을 튼다면 ‘수익형 투자기구’와 ‘정책 지원기구’의 구분은 무너진다.


이에 대해 자본시장연구원은 “개별 부처가 정책 목적에 따라 다수 펀드를 독립적으로 양산·운용하면 필연적으로 중복투자가 발생하고 재정 집행 효율이 심각하게 저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차별화된 독자 투자영역을 못 만든 채 같은 투자처로 경쟁 진입한다면, 과거의 중복투자 잔혹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다.


증세 없는 유혹 ‘초과세수’…착시 걷어내면 ‘가변성’만 남아


가장 휘발성이 큰 쟁점은 20조원이라는 규모에 앞서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를 봐야 한다. 1월 구상안에는 정부출자주식, 물납주식 현물출자, 지분취득이 명시됐다. 여기에 최근 정치권과 관가 일각에서 초과세수를 종잣돈으로 편입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더해지며 불확실성이 커졌다.


초과세수는 정치적으로 매력적인 카드다. 국민 반발을 부르는 직접 증세 없이도, 통계상 더 걷힌 세금으로 ‘미래 자산을 선제 축적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어서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추경에서 국세수입 전망을 390조2000억원에서 415조4000억원으로 25조2000억원 상향하며 세수 확보를 자신했다. 그러나 국회예산정책처는 같은 기간 국세수입을 413조8000억원으로 추정했다. 정부 전망보다 1조7000억원 낮은 보수적 수치다.


초과세수는 경기와 기업 실적, 자산시장 상황에 따라 해마다 크게 달라지는 재원이다. 일시적인 세입 증가를 수십 년간 운용할 국부펀드의 종잣돈으로 활용할 경우 안정적인 출자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1조7000억원에 달하는 추계 격차는 ‘초과세수가 장기 자본 투자기구의 안정적 종잣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기 충분하다.


초과세수는 그해 경기, 대기업 실적, 자산시장 등락, 기재부의 추계 오차에 따라 급격히 출렁이는 일시적 자금이다. 한 해 더 걷혔다고 30년을 굴려야 할 펀드의 토대로 삼는 순간, 펀드의 출자 약속은 매년 경기에 인질로 잡힌다.


정부는 공공기관 지분율을 최소 50% 이상 유지하고 법정 주주 제한을 준수하겠다는 안전장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지분율 외형 유지가 공공성 훼손 논란을 끝내지는 못한다.


어떤 기관 지분을 출자 대상으로 삼을지, 배당금을 국고와 펀드 중 어디에 우선 배분할지, 무엇보다 현물출자 자산의 가치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에 따라 공정성 논란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출자 자산의 가치 평가나 배당 배분이 불투명하면, 결국 국민 몫의 자산이 시장가보다 싸게 펀드로 넘어가거나 국고 수입이 줄어드는 방식으로 비용이 전가될 수 있다.


테마섹은 부럽지만…정치 외풍 견딜 거버넌스는 준비됐나


펀드 도입론자들은 싱가포르 테마섹과 노르웨이 정부연기금(GPFG)을 모범사례로 꼽는다. 성과는 눈부시다. 테마섹은 공식 공시 기준 2025년 3월 말 순포트폴리오 가치를 4340억 싱가포르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지난 1974년 설립 이후 연환산 주주수익률 14%(싱가포르달러 기준)를 기록 중이다.


다만 이는 최근 1년의 호실적이 반영된 ‘설립 이후’ 누적 수치다. 테마섹의 10년·20년 수익률은 각각 5%, 7% 수준이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석유·가스 수출 대금을 미래 세대 복지 재원으로 운용하는 노르웨이 펀드 역시 국가 자산 운용의 글로벌 표준으로 통한다.



국부펀드가 정권의 경기부양이나 특정 산업 지원 수단으로 동원되면 장기 수익률과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 독립적인 투자위원회와 투명한 손실 공시, 정치적 개입을 차단할 제도적 장치가 핵심이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그렇다고 이들 모델을 한국 정부가 그대로 이식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이라는 마르지 않는 원천 자본이 있다. 국내 자산시장 왜곡을 막기 위해 자금 대부분을 해외 자산으로만 운용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세웠다.


테마섹은 도시국가라는 특수성 속에서 투자기구를 정치 외풍으로부터 격리해 온 독특한 지배구조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안정적 원천 자본도, 검증된 격리 장치도 없는 한국형 국부펀드는 국내외 운용의 비대칭성과 지배구조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필요성을 설파하기에 앞서, 한국의 재정 구조와 취약한 정치 환경을 견딜 제도적 거버넌스 구축이 더 시급하다. 투자위원회의 독립적 인적 구성, 관료·정치권의 부당 개입을 차단할 제도적 제한 장치, 국회의 엄격한 사후 보고·통제, 계량화된 성과 평가 기준, 투자 실패 시 명확한 손실 공시가 핵심 뼈대가 돼야 한다.


펀드가 출범 후 정권의 단기 목표나 인위적 경기부양 수단으로 동원되는 순간, 장기 수익률은 구조적으로 훼손된다. 정치적 압력에 밀려 사양 산업이나 특정 대기업, 지역 개발 사업에 자금을 넣으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면, 이 기구는 시장의 감시자가 아니라 관제 정책의 집행기구로 전락한다.


세계 주요 국부펀드가 따르는 ‘산티아고 원칙(Santiago Principles)’이 지배구조의 독립성, 운영의 책무성, 회계 투명성, 상업적 이익만을 좇는 신중한 투자를 골자로 삼은 이유를 정부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형 테마섹’을 말하기 전에, 테마섹을 테마섹으로 만든 거버넌스부터 묻는 것이 순서다.

배군득 기자 (lob13@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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