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농장에서, 일제강점기 정미소로 간 ‘바냐 아재’ [D:헬로스테이지]
입력 2026.05.31 11:01
수정 2026.05.31 11:01
조성하·심은경 주연
5월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저응 저응 아이 러브 유”
“아이고 망칙해라 아이 돈 노우 빠이 빠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풍미했던 익살스러운 만요(漫謠)가 객석에 흐른다. 경쾌한 선율 뒤로 비죽이 새어 나오는 비애는 안톤 체호프의 고전 ‘바냐 아저씨’가 도달할 1939년 충북 영동의 정미소 마당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인 연극 ‘바냐 아재’는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 대신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시린 한복판으로 고전의 서사를 옮겨 심었다. 원작의 주인공 ‘바냐’는 평생을 바친 헌신 뒤에 허무만 남은 ‘박이보’가 되었고, 조카 ‘소냐’는 고된 노동을 묵묵히 감내하는 ‘서은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이름의 변화는 단순히 배경을 바꾸는 작업을 넘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마주했던 시대적 무력감과 원작의 정서를 정교하게 결합하며 낯설면서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이번 공연은 비슷한 시기 다른 극장에서 공연 중인 ‘바냐 삼촌’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손상규 연출이 배우들의 신체 언어와 리듬감을 활용해 원작의 결핍을 보다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면, ‘바냐 아재’는 1939년 영동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을 통해 고전이 어떻게 우리 역사의 맥락 안에서 숨 쉴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특히 극에는 1930년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만요가 삽입돼 있다. ‘전화일기’를 시작으로 ‘청춘계급’ ‘남무아미타불’ ‘청춘삘딩’ 등 적재적소에 배치된 만요는 당대의 세태를 익살스럽게 풍자하면서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부각하기도 하면서 극의 몰입을 돕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동시에, 원작이 지닌 비희극적 특성을 한국적 정서로 풀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국립극단
시대적 배경을 바꾸면서, 공간인 ‘무대’도 완전히 달라졌다. 무대는 극의 흐름에 따라 시각적인 압도감을 선사하며 서사를 뒷받침한다. 1막에서 3막까지는 마당의 연못과 전통 건축 양식인 누마루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실제 물을 채운 연못과 정교하게 세워진 누마루는 평화롭지만 어딘가 정체된 인물들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물들은 누마루에 걸터앉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연못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소모한다. 이때 무대 위로 직접 쏟아지는 실제 빗줄기는 인물들이 처한 우울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며 객석까지 그 습한 공기를 전달한다. 일제강점기 말기라는 시대적 압박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소모되는지, 그 정적인 풍경은 러시아의 농장 설정보다 훨씬 선명한 실체로 다가온다.
공연의 압도적인 긴장감은 4막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1~3막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당했던 누마루와 연못이 순식간에 사라진 자리를 천장 높이까지 솟아오른 거대한 정미소 기계 장치들이 가득 채운다. 거대 기계들은 해오름극장의 넓은 무대를 완전히 점유하며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억누른다. 이 거대한 설비는 단순히 정미소라는 공간을 설명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나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물리적 실체로 기능한다. 쌀을 찧는 기계의 육중한 존재감은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붕괴를 외부의 압박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며 관객에게 시각적 경외감을 선사한다.
ⓒ국립극단
배우들의 열연은 이러한 무대 장치의 무게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박이보(바냐) 역의 조성하는 평생을 바친 헌신이 무너졌을 때의 허탈함과 그로 인한 분노를 밀도 있게 연기한다. 그는 3막 후반부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며 인물이 견뎌온 인내의 시간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국내 연극 무대에 처음 도전한 서은희(소냐) 역의 심은경은 삶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인물의 단단한 내면을 그려낸다. 짝사랑의 아픔과 가중되는 노동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한다고 나직하게 말하는 심은경의 마지막 독백은 객석에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고전이 주는 위로를 현재의 관객에게 전달한다.
박이보(원작의 바냐) 역에 조성하, 서은희(소냐) 역에 심은경, 양말례(마리야) 역에 손숙, 서병후(세레브랴코프) 역에 남명렬, 오영란(엘레나) 역에 임강희, 안해일(아스트로프) 역에 김승대, 마점점(마리나) 역에 정경순, 이기진(텔레긴) 역에 기주봉 등이 출연한다. 공연은 5월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