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어오기식 ‘이식’보다, 자생적 ‘씨앗’ 심어야” [반쪽짜리, 지역 문화 이식③]
입력 2026.05.31 14:01
수정 2026.05.31 14:01
시설 이전비로 지역 예술단 육성, '독점 콘텐츠'가 관건
"정치 도구화 멈추고 상생 네트워크 구축, 정책 전환 시급"
“성공한 서울의 모델을 단순히 오려 붙인다고 해서 지방의 문화 자생력이 생겨나지 않는다. 타 지역의 자산을 일방적으로 빼앗아 오는 하향식 이식은 현장의 저항과 혈세 낭비만을 야기할 뿐이다.”
한 예술경영 전문가의 지적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강행되는 문화예술 기관 이전 정책이 왜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혔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인프라의 공간 분리가 초래하는 역설을 넘어, 이제는 지역이 주도적으로 고유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자생적 배양’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DIMF
정치적 강요나 기존 기관의 인위적 이전 없이, 지역 스스로 투자를 지속해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한 부산국제영화제(BIFF)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은 자생적 문화 조성이 가진 실효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다.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민간 전문가 중심의 조직위원회 자율 운영 방식을 철저히 고수했다. 지방정부는 행정과 재정적 지원에만 집중하고 운영의 전권은 전문가 집행위원회에 위임하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물론 부산의 사례 역시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와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 등 수도권의 핵심 영상 관련 기관들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과 논란을 겪었다. 하지만 핵심은 ‘순서’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아무런 토양이 없는 상태에서 기관부터 강제 이식한 것이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자생적 씨앗을 통해 도시 스스로 ‘영화 도시’의 브랜드를 먼저 공고히 다져놓았기에 국책 기관의 이전이 실질적인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2006년 시작된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역시 대구시가 ‘뮤지컬 중심 도시’라는 특화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며 추진한 결과물이다. 서울의 특정 공연 기관을 유치하는 방식이 아닌, 해외 프로덕션과의 교류, 국내 창작 뮤지컬 지원, 미래 인재 발굴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구축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배성혁 집행위원장은 “딤프는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20년 동안 지역 도시인 대구에서 최대 규모로 개최되어 왔다”라며 “과거 정부가 전개하지 못했던 창작 뮤지컬 지원 사업과 무대화 제작, 전문 아카데미 운영, 차세대 뮤지컬 배우 발굴을 위한 ‘딤프 뮤지컬스타’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점이 근본적인 차별점”이라고 밝혔다.
이어 “선진 뮤지컬 시장인 영국과 미국이 오랜 시간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가 아닌 외곽 지역에서 테스트베드를 거쳐 검증된 작품을 대형 무대에 올렸듯, 대구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라며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소유의 옛 도청 이전 부지까지 축제의 공간으로 확보한 만큼, 인프라와 콘텐츠를 모두 아우르는 자생적 생태계 구축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관 이전에 소요되는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역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재원으로 재배치하는 대안이 제시된다. 기존 기관을 무리하게 옮기는 인프라 구축 비용 대신, 지역 전용 예술단을 신규 창단하여 현지 예술인을 직접 발굴·육성하는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분석이다.
뮤지컬 '한 여름밤의 템페스트' ⓒ충북도립극단
실제로 충북문화재단이 창단한 충북도립극단의 사례는 지역 자생력 기반 투자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충북도립극단은 충북 출신의 현지 공연 예술인들로만 단원을 구성해 지역 고유의 서사를 담은 창작 작품을 제작해왔다. 지난해에는 뛰어난 완성도를 바탕으로 연극 ‘한 여름밤의 템페스트’로 서울 무대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수도권의 극장 대관 문제로 이틀간의 단기 공연에 그쳤지만, 지역의 자체적인 인력 발굴과 기획력만으로도 서울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독점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한 선례다.
한 지역 예술 단체 대표는 “수도권 기관을 억지로 이전하는 예산이 있다면, 차라리 그 지역의 역사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여 그곳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독점 콘텐츠’ 개발에 집중 투자하는 편이 낫다”라며 “이와 함께 지역 대학 예술 학과와의 산학 연계 프로그램을 확충함으로써, 지역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이탈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해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콘텐츠가 없는 그릇에 외부 기관만 밀어 넣는 행정에서 벗어나, 지역 내부에 문화적 씨앗을 심는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지역 내부에서 독점 콘텐츠를 자생적으로 틔울 수 있는 토양이 확인되었음에도, 현지 생태계 보듬기 대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수도권 인력과 기관을 통째로 옮겨오려는 행정은 결국 선후가 뒤바뀐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충북도립극단의 사례처럼 지역이 우수한 콘텐츠를 생산하더라도 수도권의 높은 진입 장벽과 플랫폼 한계에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인프라의 무조건적인 공간 분리 대신 ‘연대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상생 모델이 효과적인 접근법으로 꼽힌다. 수도권의 선도 기관과 지역 문화예술 단체 간의 공동 제작을 활성화해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유통 인프라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한 예술경영 전문가는 “물리적인 청사 이전 없이도 수도권 기관의 지역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현지 순회공연 및 전시 기회를 제도적으로 넓힌다면 문화 향유 기회를 전국으로 충분히 확산할 수 있다”라며 “정치가 문화예술을 선거철 표심이나 행정 성과를 위한 도구로 삼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지역균형이라는 명분은 오히려 예술 생태계 전체를 고사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