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中, 브리티시 스틸 둘러싸고 난타전
입력 2026.07.26 07:07
수정 2026.07.26 07:07
中 징예그룹, 경영난 브리시티 스틸 용광로 폐쇄 조치 밝혀
“철강은 전략 산업” 내세운 英, 브리티시 스틸 국유화 조치
中 “중국 기업의 이익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 취할 것”
징예그룹, 투자손실 본 만큼 손실보장 위해 법적 대응 예고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지난 1월2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영국과 중국이 ‘브리티시 스틸’(British Steel)을 둘러싸고 격렬한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영국 정부가 브리티시 스틸에 대해 ‘국가 안보’를 내세워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자 중국 정부가 강력히 반발한 데 이어 전 소유주인 중국 징예(敬業·Jingye)그룹은 완전한 손실 보장을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 징예그룹은 지난 19일 소셜미디어(SNS) 웨이신(微信·Wechat) 계정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영국 정부의 브리티시 스틸 국유화 조치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훼손하고 국제 투자자들의 심리를 위축시켜 투자 손실을 입은 만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고 영국 BBC방송,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20일 보도했다.
징예그룹은 성명에서 “영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적나라한 강탈 행위이자 국제 법치에 대한 공공연한 유린”이라며 “관련 양자투자협정에 따른 협의 절차를 이미 개시했으며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국제 중재를 포함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법치는 짓밟혀서는 안 되며 계약 정신은 모독돼서는 안 된다”며 “법치가 이 정도까지 무너졌는 데 누가 감히 영국에 계속 투자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영국의 쇠락한 제조업을 상징하는 브리티시 스틸과 징예그룹의 ‘악연’은 5년여 전인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영국 철강산업이 급속히 쇠락하는 기미를 보이면서 영국 정부는 1967년 스컨소프 등 여러 철강업체들을 합병해 국영 철강 기업인 ‘브리티시 스틸’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럼에도 브리티 스틸은 실적이 좋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됐고 이를 보다 못한 마가렛 대처 정부는 1988년 브리티시 스틸을 다시 민영화했다.
그렇지만 경영난이 지속되면서 브리티시 스틸은 1999년 네덜란드의 철강사와 합병하는 길을 택했다. 심기일전한 끝에 브리티시 스틸은 이 당시 세계 9위의 철강업체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따뜻한 봄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빠른 속도로 치고 나오는 한국과 일본 등 신흥국을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2006년 인도 철강기업 타타스틸에 인수됐다. 불과 반세기 전 식민지 지배했던 인도에 영국의 핵심 산업을 넘겨준 셈이다.
영국 북동부 스컨소프에 위치한 브리티시 스틸 공장 전경. ⓒ AP/연합뉴스
타타스틸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인수 직후 터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로 인해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브리티시 스틸을 소생시키에는 힘에 부쳤다. 타타스틸도 2016년 기업개선 전문 투자회사인 영국 그레이불 캐피탈에 이 회사를 단돈 1파운드에 넘겨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국 파운드화 가치 절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싼 불확실성, 미·중 무역전쟁 격화 등 국내외적 악재 요인으로 주문량이 현저히 감소하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 주인을 찾지 못해 2019년 5월 청산 절차에 돌입해 영국 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던 브리티시 스틸은 2020년 3월 5300만 파운드(약 1053억원)를 부르며 손을 내민 징예그룹에 지분 100%를 매각했다.
징예그룹 역시 별달리 뾰족한 경영수완을 발휘하지 못한 까닭에 열악한 시장환경과 관세, 비용 문제 등을 이유로 두 개의 용광로 폐쇄 방침과 함께 대규모 구조조정을 위한 협의에 착수했다. 징예그룹은 12억 파운드를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하루에 70만 파운드의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 북동부 스컨소프 지역에 있는 브리티시 스틸 공장은 현재 27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데, 이들의 일자리마저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특히 브리티시 스틸의 용광로가 폐쇄되면 영국은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국내에 1차 제철 능력이 없는 국가가 될 상황에 놓일 위기에 처했다. 당황한 영국은 브리티시 스틸 살리기에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지난 4월12일 키어 스타머(왼쪽 네번째) 당시 총리가 영국 북동부 스컨소프 브리티시 스틸 공장을 찾아 근로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영국은 징예그룹과 머리를 맞대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난항이 계속됐다. 영국 정부는 친환경 철강 생산 전환을 위한 5억 파운드 규모의 정부 보조금 지급이나 용광로 가동을 위한 원자재 구입 등을 제안했지만, 징예그룹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조나단 레이놀즈 영국 산업통상부 장관은 “징예그룹에 대한 (정부의) 제안이 상당했음에도 그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영국 정부는 현재 철강 산업을 국가 전략의 우선 순위로 지정하며 거액의 예산을 편성하는 등 회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오랜 기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철강산업의 시대적 흐름을 되돌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가공되지 않은 철강 생산량은 50%가량 감소했다. 이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에 25% 관세를 부과한 것도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영국은 지난해 징예그룹이 스컨소프 제철소의 용광로 2기 폐쇄를 추진하자 긴급통제권을 발동해 경영에 개입했고, 이후 국유화 절차를 추진했다. 영국 내 철강 생산 능력을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자산으로 판단한 키어 스타머 당시 총리는 "브리티시 스틸은 영국 산업적 강점의 초석 중 하나로, 이는 고숙련 일자리를 보호하고 중대한 국가적 역량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라고 역설했다.
징예그룹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영국 정부는 지난 16일 과단성 있게 밀어붙여 브리티시 스틸의 국유화 절차를 끝냈다. 이와 함께 징예그룹에 대한 배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독립적인 평가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징예그룹의 브리티시 스틸은 영국 정부가 사실상 보상이 거의 없는 수준의 조건만 제시했다고 반발했다.
ⓒ영국 BBC방송
브리티시 스틸을 빼앗겼다고 판단한 중국은 분기탱천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번 사안의 처리 방식이 중국 투자자들의 영국 투자 환경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무부도 영국 정부의 국유화 조치에 단호히 반대한다면서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상무부는 “영국 측은 징예그룹이 영국 경제·사회에 기여한 바를 무시한 채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브리티시 스틸을 강제로 인수해 국유화함으로써 징예그룹의 정당한 권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 기업들의 영국 투자에 대한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덧붙였다.
상무부는 이어 "이번 사건의 진행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중국 기업이 법적 수단을 활용해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지지할 것"이라면서 "중국 기업의 이익을 확고히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관영 매체들도 징예그룹을 옹호하며 일제히 측면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 영자신문 글로벌타임스(GT)와 국제뉴스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21일 징예그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같은 내용의 논평을 냈다. 이들 매체는 “2020년 징예그룹이 파산 위기에 놓인 브리티시 스틸을 인수해 5년 간 장비 업그레이드 등에 12억 파운드 이상을 투자했다”고 징예그룹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옮겼다.
논평은 브리티시 스틸을 국유화하게 되면 영국 정부가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야 한다며 “영국 정부는 한쪽에선 징예의 자산을 강탈하고 한편으로는 납세자의 돈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징예그룹은 소유권을 양도할 경우 부채를 상환하고 투자를 회수하기 위해 최소 10억 파운드를 보상해야 한다고 밝힌 반면 영국 정부는 1억 파운드 미만으로 제시했다”고 덧붙였다.
ⓒ 자료: 중국 국가통계국
영국 정부와 징예그룹 간의 협상이 끝내 결렬되자 이들 매체는 영국이 법적인 수단으로 강제 집행했다며 "강제로 집행된 이상 징예그룹에 대한 적절하고 충분하며 효과적인 배상을 제공하는 것이 법적 의무로 징예그룹의 모든 투자는 증거가 있다"고 역성을 들었다.
이들 매체는 징예그룹이 브리티시 스틸을 인수한 후 5년간 코로나19 팬데믹(유행병의 세계적 대유행) 충격, 브렉시트,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도전 속에서도 감원과 임금 체불이 없었다며 "이에 영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자산을 강탈하는 것으로 보답했다"고 목청을 돋웠다.
더욱이 징예그룹이 파산 위기에 놓인 브리티시 스틸에 도움을 줬음에도 영국이 현대판 ‘농부와 뱀’을 연출했다며 “국가의 힘과 행정 수단으로 자산을 강탈하는 행위는 국제 비즈니스의 기본 정의를 짓밟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와 함께 “영국 정부가 훼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중국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자국의 신뢰성, 글로벌 투자자의 신뢰, 그리고 법치 국가로서 가진 명성의 근간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