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1년] 삼성부터 하청까지…성과배분·직접교섭 시대 열렸다
입력 2026.05.28 06:00
수정 2026.05.28 06:00
노란봉투법 3월 시행…하청 노조 원청 직접 교섭 요구 잇따라
성과급 체계 제도화·'영업익 N%' 요구 산업 전반 확산 조짐
재계 "경영 불확실성 확대" 우려…노동계 "성과 독식 안 돼"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2회 국무회의 겸 제9차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삼성전자 총파업을 앞두고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통신사진기자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약 1년이 됐다. 그 사이 제조업 노사 관계의 판이 달라졌다. 이른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하청 노조의 원청 직접 교섭 요구가 잇따르고 기업 성과를 노동자와 나누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임금 협상 중심이던 노사 교섭이 원·하청 관계와 성과 배분 구조까지 논의하는 단계로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
변화 ① 원청도 교섭 상대가 됐다
변화의 기폭제는 지난 3월 10일 시행된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이다.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될 경우 사용자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고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개별화해 노조의 파업 부담을 낮추는 것이 핵심이다.
고용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시행 첫날 하청 노조 407개가 원청 221곳에 교섭을 요구했다. 이틀 만에 대상 원청은 248곳으로 늘었고 한 달 뒤에는 원청 372곳을 상대로 하청 노조 1011곳이 교섭을 신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SK하이닉스 청주캠퍼스의 물류 협력업체 피앤에스로지스 노조는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는 SK하이닉스를 상대로 곽노정 대표이사를 수신인으로 한 내용증명을 발송하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 하청 노조가 성과 배분을 이유로 원청에 직접 교섭을 요구한 첫 사례다.
다만 지난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전 사안에 대해서는 기존 법리를 유지했다. 대법원은 HD현대중공업 하청 노조의 단체교섭 청구 소송에서 원청의 교섭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청 노조가 소송을 제기한 지 9년 만의 결론이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노란봉투법이 적용되는 향후 사건에서는 입법 취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원·하청 직접 교섭 분쟁의 기준이 될 판결로 관심을 모은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법률) 시행 첫날인 지난 3월 10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양경수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변화 ② 성과배분 요구가 산업 전반으로 번졌다
지난해 9월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하고 기존 상한선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노사가 합의했다. 이후 삼성전자까지 유사한 성과급 제도화에 합의했고, 해당 잠정합의안은 전날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하며 최종 확정됐다. 재계에서는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이 새로운 교섭 의제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에서 시작된 '영업익 N%' 요구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번졌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노조 요구안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조1000억원 규모다. 성과급 확대나 이익 공유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다른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변화 ③ 정부가 교섭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삼성전자 총파업이 현실화할 경우 반도체 생산 차질과 산업 경쟁력 훼손 우려가 제기되면서 정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정부서울청사에서 발표한 대국민담화에서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을 언급했고,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총파업 직전 경기지방고용노동청으로 직접 달려가 교섭을 중재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노조를 향한 경고를 보냈다. 노동계 출신 장관이 직접 교섭 현장을 찾아 중재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었다.
친노동을 표방한 정부가 긴급조정권 카드를 꺼내지 않으면서도 자율교섭 타결을 유도하는 투트랙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명 정부의 노동정책 기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노동계에서는 하청 노동자의 실질적 교섭권 보장, 손해배상 부담 완화 등이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반면 재계에서는 상시 교섭 체제와 경영 불확실성 확대를 우려한다.
법무법인 바른은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 발간한 보고서에서 "노사 간 신뢰 부족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임금체계 전환은 제도 도입의 높은 허들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법 시행 이후 제조업 노사 관계는 임금 협상 중심에서 원·하청 관계와 성과 배분 구조까지 논의하는 단계로 확대되고 있다. 현대차·HD현대중공업·카카오 등 주요 사업장의 교섭 결과가 현장에 어떻게 자리 잡을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다만 새 노사 질서의 방향을 두고 노동계와 재계가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평행선이다.
한국노총은 "대기업의 성과가 원청 내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협력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성과 배분을 촉구했다.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요 기업 1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74.7%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하청 노조의 원청 교섭 요청과 과도한 요구 증가"를 가장 큰 우려 요인으로 꼽았다.
여명구 삼성전자 부사장(왼쪽)과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 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 위원장이 27일 경기 용인시 기흥에 위치한 삼성전자 The UniverSE에서 열린 2026년 임금협약 조인식에서 서명하고 있다.ⓒ삼성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