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태도, 달라지지 않아" 한선화 초심을 무기로 전진 [D:인터뷰]
입력 2026.05.23 08:49
수정 2026.05.23 08:50
'교생실습' 주연
수능 귀신에 맞서 죽음의 모의고사를 치르게 된 열혈 MZ 교생과 흑마술 동아리 소녀들의 독특한 생존기를 그린 영화 ‘교생실습’은 기존 학원 공포물의 문법을 비틀며 극장가에 신선함을 안겼다. 영화는 한국 학원 공포의 클래식인 ‘여고괴담’이나 ‘고사’ 시리즈의 익숙한 계보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레트로 게임 감성과 오컬트 서바이벌 요소를 키치하게 버무려 완전히 새로운 장르적 재미를 확보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고스트 스튜디오
MZ 교생 은경 역을 맡은 한선화는 작품의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 사명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한선화에게 ‘교생실습’ 시나리오는 색깔이 워낙 강해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독특하게 다가왔다. 은경이 내뱉는 대사들 역시 현실감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은 이내 작품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마침 ‘파일럿’ 활동을 마치고 영화제도 다니며 잠시 쉬고 있던 시기였는데, 연초쯤 ‘이제 다음 작품은 뭘 해야 하지’ 고민하던 타이밍에 이 시나리오를 받게 됐죠.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독특했던 지점들이 김민하 감독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물음표들이 하나씩 느낌표로 바뀌더라고요. ‘아,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감독님이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었구나’ 싶었어요. 배우로서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새로운 장르를 시도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했고요. 만약 너무 빨리 왔거나 반대로 더 늦게 왔으면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모로 인연처럼 다가온 작품이었고, 많은 분들이 이 독특한 세계를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정했어요.”
은경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집중한 핵심 가치는 ‘진정성’이었다. 독특한 상황 속에서도 은경이 가진 사명감과 학생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만큼은 가짜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캐릭터의 기본값 자체가 워낙 독특하게 설정돼 있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그냥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의 전작인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단편 ‘혈세’를 보면서 이분은 의도를 심플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팅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점점 감이 잡혔고요. 은경이라는 인물이 가진 사명감, 학생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을 최대한 진정성 있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정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죠. 결국 제가 준비한 것보다 감독님을 믿고 그 세계관 안에 몸을 맡긴 게 가장 컸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볼 사람은 보고, 아닐 사람은 말아라’라는 마음으로 임했죠. 감독님도 비슷한 마음으로 연출하셨을 거예요.”
오컬트와 서바이벌, 코미디가 뒤섞인 생소한 장르는 누군가에게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높은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 한선화는 그동안 대중과 쌓아온 친숙함과 신뢰라는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했다.
“‘교생실습’을 보면서 저는 김민하 감독님이 만든 독특한 세계관에 관객들이 조금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 있는 세계를 제 얼굴과 연기를 통해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교생실습’이 지닌 독창적인 에너지는 메가폰을 잡은 김민하 감독의 독보적인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한선화는 현장에서 마주한 감독의 열정적인 태도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치켜세웠다.
“김민하 감독님은 은경 못지않게 열정적인 분이에요. 굉장히 긍정적이고 꿈이 많은 청년 같달까요. 실제로 긍정적인 태도가 좋은 리더십을 만든다는 걸 현장에서 많이 느꼈어요. 감독님은 제가 걸어온 과정, 제 스타일과 태도를 진심으로 좋아해주셨고, 제가 출연했던 작품들도 애정을 갖고 봐주셨죠.”
영화는 지난해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작품상’과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배우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영화제에는 감독 고유의 장르와 색깔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팬들이 아주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정 연출자의 세계관을 이토록 집단적이고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강력한 팬덤을 직접 목격한 것은 배우로서도 처음 있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감독님 팬이 정말 많더라고요. 김민하 감독님의 장르와 색깔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어서 놀랐어요. 이렇게 집단적으로 감독님의 세계관을 지지하는 팬들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부천에서 특히 더 실감했죠. 정말 영광이었어요. 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라는 공간 자체가 장르영화를 사랑하는 영화제잖아요. 그래서 이 영화가 부천과 정말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시도적이고 독특하고, 다음 작품이 계속 궁금해지는 감독이랄까요.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올까’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이에요.”
극 중 은경이 혼란스럽고 기괴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실제 한선화에게도 험난한 연기의 길을 헤맬 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스승이 존재한다. 바로 배우 연제욱이다.
“연기에 대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선배들도 있어요. 연제욱 선배님 같은 분들이요. 동료이자 존경하는 선배예요.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걸 이야기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가끔 만나 술 한잔하면서 연기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고스트 스튜디오
2009년 그룹 시크릿의 멤버로 대중 앞에 처음 나선 한선화는 2013년 KBS2 드라마 ‘광고천재 이태백’을 통해 본격적인 연기 활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배우 전향 이후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지치지 않는 꾸준함이었다. 큰 공백기 없이 매년 묵묵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노력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술꾼도시여자들’의 메가 히트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와 영화 ‘파일럿’ 등을 통해 사랑 받았다. 한선화의 진가는 단순히 흥행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영화 ‘창밖은 겨울’, ‘교토에서 온 편지’ 등 깊이 있는 서사를 가진 독립영화에도 출연하며 연기적 내실을 다져왔다.
“저는 늘 저라는 사람 그대로 연기하려고 해요. 매번 최선을 다하다 보면 결국 뭔가 되어 있겠지 하는 마음이랄까요. 독립영화도 정말 많이 했고,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계속 노력해왔어요. 어떤 팬분이 글을 올려주셨는데 활동한 지 벌써 16년이 됐더라고요. 배우가 됐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여전히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저예산 영화든 크게 가리지도 않아요. 아직 만나보지 못한 작품과 인물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상업적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하다 보니 ‘이제 독립영화는 안 할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현재 한선화는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장미란 역으로 출연 중이다. 대본이 가진 메시지에 깊이 매료된 만큼, 장미란이라는 인물을 완성하기 위한 현장에서의 몰입과 노력 역시 뜨거웠다. 대사 한 줄, 지문 하나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수없이 고쳐 읽은 탓에 현재의 대본은 필기와 손때로 빼곡해진 상태다.
“‘모자무싸’ 대본은 정말 특별했어요. 평소에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신을 어떻게 표현할지 일적으로 읽게 되는데, 이 작품은 쉬어가듯 읽게 되는 대본이었어요. 좋은 소설책 읽는 느낌이랄까요. 나중에 대본집이 나오면 다시 사고 싶어요. 무엇보다 대사들이 정말 좋았어요. 인간의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작은 행복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요. 사람 마음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문장들이 많았어요.”
한선화는 이번 작업을 통해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신인 창작자들과의 협업이 지닌 가치를 깊이 깨달았다. 앞으로도 한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저는 관객들과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영화가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라는 걸 알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이 세계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분들이 보면 정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이런 장르의 작품을 제 필모그래피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해요. 앞으로도 여러 장르 안에서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신인 감독님들의 재미있는 시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관객분들도 다양한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해요. 저희 영화도 한 번 꼭 경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