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위원장 울먹이게 만든 삼성 사태의 '정치역학' [박영국의 디스]
입력 2026.05.21 11:06
수정 2026.05.21 11:09
국내 최대 기업의 상징성→최 위원장 정치적 인물 부각
지선 앞두고 파업 악재→친 노조 정부도 '저지' 불가피
정치판 축소한 노조의 태생적 특성→합의안 부결시 정치적 타격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최승호 위원장이 20일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총파업 예고 시점을 하루 앞두고 열린 3차 사후조정 회의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전 국민적 우려를 낳았던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일단 봉합됐습니다. 20일 저녁 늦게 노사가 임금·단체협약(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마련하면서 당초 21일 예정됐던 총파업이 유보된 겁니다. 아직 노동조합원 찬반투표가 남아 있으니 안심하긴 이르지만, 큰 고비는 넘겼다 할 수 있겠습니다.
노사간 교섭이 결렬되고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나선 가운데 이뤄진 사후조정까지 무산되며 교섭 분위기가 비관적으로 흐르던 20일 오전,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후조정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최승호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 위원장이 교섭 결렬에 따른 총파업 돌입 계획을 밝히며 울먹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회사와 국가경제를 볼모로 막대한 성과급 지급을 강제하는 황제노조의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의 고민과 그가 짊어진 부담감, 그리고 그로 인한 울먹임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초기업노조는 당초 ‘정치투쟁’을 지양한 ‘실리투쟁’ 노선을 내걸고 출범했습니다. 정치적 방향성이나 상급단체의 노선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조합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익=돈’의 공식이 성립된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막상 일을 벌여 보니 삼성전자 과반노조 위원장으로서 파업을 지렛대로 교섭을 하면서 ‘정치역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절감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삼성이라는 회사 자체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수가 없는 위치입니다. 국내 최대 기업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큰 축을 담당하는 회사입니다. 삼성전자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회사가 큰 손실을 입는 것은 물론, 국내 경제 전반과 글로벌 공급망까지 파장이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면서 파업의 선봉에 선 ‘최승호’라는 개인이 매우 ‘핫’한 정치적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삼성전자 노조가 파업을 예고한 시기가 하필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았으면 삼성전자 노조는 21일부터 6월 7일까지 18일간 파업을 했을 것이고, 그 사이에는 6·3 지방선거라는 떠들썩한 정치 이벤트가 끼어 있습니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선거운동 개시일에 맞춰, 국내 최대 기업 노조가, 국내 경제를 뒤흔들 만한 일을 벌인다니, 정부와 여당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소년공 출신 대통령과 운동권 출신 국무총리와,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 포진한 현 정부가 맹목적으로 노조 편을 들지 못하고 오히려 노조의 폭주를 막아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과 지나친 성과급 요구를 비난하자 그의 지지층도 노조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친 노동계 성향을 보여온 진보 매체들까지 삼성전자 노조를 비난합니다. 보수 진영은 애초에 반대편에 있었는데 진보 진영까지 등을 돌리니 세상 천지에 삼성전자 노조 편은 없습니다.
노조 내부의 정치역학도 최 위원장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투쟁’을 통해 사측으로부터 받아낸 성과급 재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놓고 사상 최대 실적을 낸 반도체(DS)무문과 세트(DX)부문 조합원간 갈등이 있었고, DS부문 내에서도 영업이익 흑자를 오롯이 담당한 메모리사업부와 적자를 낸 비메모리사업부 모두 불만이 없도록 조율하는 게 교섭 과정에서 큰 고충이었을 겁니다. 사측에 ‘최대 실적에 걸맞은 성과보상을 하라’고 압박해 놓고 적자 사업부 직원들에게까지 억대 성과급을 쥐어줘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펼치게 된 것도 결국은 노조 내부의 정치역학 때문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잠정합의가 이뤄졌지만 최 위원장은 앞으로 더 큰 정치적 난관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노사 잠정합의안은 노조 내부적으로 찬반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이 때부터 노조 집행부는 사측과 한 배를 타게 됩니다. 잠정합의안 가결을 위해 조합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공동의 목표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정합의안이 부결되면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리더십을 잃은 노조위원장은 다음 선거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노조위원장 선거는 ‘정치판’을 축소해놓은 것과 같습니다. ‘야당’에 해당하는 노조 내 현장조직에게 선거에서 밀리면 기존 위원장과 집행부는 노조 전임자 자리를 내놓고 업무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종의 ‘정권교체’와 같습니다.
다른 대기업들도 노사 교섭 과정에서 노조 집행부가 ‘합리적인 선’에서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내세우며 사측과 기나긴 줄다리기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잠정합의안을 가져갔다간 조합원들로부터 ‘어용’ 소릴 듣습니다.
삼성 초기업노조가 출범 당시 이런 일들을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노조는, 특히나 삼성과 같이 영향력이 큰 기업의 노조는 정치역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비관적 미래를 예견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그래서 삼성의 임단협은 앞으로도 매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주기적 악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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