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죽는 병 아니다…병보다 무서운 건 '낙인'"[명의열전]
입력 2026.05.13 14:18
수정 2026.05.13 14:22
김태형 순천향대 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 인터뷰
“치료하면 바이러스 미검출…일상생활로 전파 안 돼”
국내 신규 감염 감소세…“진단·치료 체계는 성공적”
“조기진단 막는 사회적 낙인 가장 안타까워”
환자를 향한 사'명'감으로 의료 현장을 지켜온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전'달하겠습니다. 각 분야에서 환자 치료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분을 제보해주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김태형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연구부원장)가 데일리안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2007년 방영된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에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에 걸린 소녀 봄이(서신애)가 등장한다. HIV 감염으로 발생하는 에이즈는 당시만 해도 ‘걸리면 죽는 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을 돌아보게 만든 작품으로 남았다.
실제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이 드라마 시청 후 에이즈와 감염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4%가 “인식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다. 특히 ‘에이즈 감염인과 식사할 수 있다’는 질문에는 시청자의 62.6%가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흘렀다. 의학은 크게 발전했고, HIV는 더 이상 과거처럼 ‘곧 죽는 병’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바이러스 전파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만성질환처럼 관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의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김태형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연구부원장)는 최근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HIV 감염이 사회적 낙인이자 저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약물 치료를 받으면 최소한 이 병으로 사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완치라는 표현을 의학적으로 쓰기는 어렵지만 치료를 통해 완치와 거의 같은 상태를 만들 수 있다”며 “치료가 잘 되면 혈액 내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가 되고, 이 경우 일상생활에서 전파될 위험은 사실상 없다”고 설명했다.
“이젠 HIV로 죽지 않는다”…달라진 치료 환경
ⓒ게티이미지뱅크
HIV는 면역세포를 파괴해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는 바이러스로 치료하지 않으면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감염성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HIV에 감염됐다고 모두 에이즈 환자인 것은 아니다. HIV 감염인 중 면역체계가 손상됐거나 특정 감염·암 등의 질환이 나타난 경우를 에이즈 환자로 분류한다.
국내 HIV 관리 체계도 과거와 비교해 크게 달라졌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4년 새롭게 신고된 HIV 감염인은 975명으로 전년(1005명) 대비 3.0% 감소했다. 국적별로는 내국인이 714명으로 전체의 73.2%를 차지했고, 외국인은 261명(26.8%)이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신규 감염을 2023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HIV 진단만 되면 치료 연계가 거의 100%에 가깝고, 치료받는 감염인의 대부분이 바이러스 억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의료보장 체계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상당히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2015년 이후 진단 즉시 치료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방치된 감염인이 줄었고, 그 결과 전파도 감소하는 집단 치료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내국인 기준으로 보면 국내 HIV 방역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성공적’이 아니라 ‘성공적인 편’으로 토가 달리는 것은 의료계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진단 지연’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HIV에 대한 공포와 낙인이 여전하다 보니 검사를 망설이거나, 양성 판정을 받고도 병원을 찾지 못하는 적지 않아 방역에 걸림돌이 된다.
김 교수는 “보건소에서 양성 판정을 받고도 두려움 때문에 병원에 오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며 “진단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HIV는 치료만 잘 받으면 전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질환”이라며 “오히려 문제는 본인이 감염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극히 드물게 치료를 중단한 경우”라고 강조했다.
HIV는 일상생활로 전파되지 않는다. 전파 경로는 주로 치료받지 않은 감염인과의 성관계, 주사기 공동 사용 등이다. 과거에는 수혈로 인한 감염 사례도 있었지만 현재는 혈액 검사 체계가 강화되면서 이로 인한 감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감염인이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는 데 격리가 필요한 병이 아니다”라며 “수건을 같이 쓰거나 국을 같이 먹는다고 전염되지 않고, 연인 간 가벼운 스킨십으로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이 밥 먹어도 안 옮는다”…여전한 오해와 낙인
김태형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연구부원장)가 데일리안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HIV를 둘러싼 오해가 여전하다는 사실은 최근의 몇몇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한때 온라인에서는 ‘네일아트를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식의 이야기가 확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바이러스는 사람 몸 밖에서 오래 생존하기 어렵다”며 “그런 사례는 에이즈 공포증에서 비롯된,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남성 성소수자와 HIV를 단순히 연결하는 시선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그는 “남성 동성애자 집단에서 HIV 감염 비율이 높다고 해서 남성 동성애 자체가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라며 “HIV는 특정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예방·치료 접근성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했다.
치료 환경은 크게 좋아졌지만 감염인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병 자체보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공포와 편견, 우울과 차별로 인한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젊은 직장인이 3~4개월마다 병가를 내고 병원에 가면 주변에서 이유를 묻게 되고, 그때마다 설명하거나 숨겨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병원에 약을 타러 오는 일조차 감염인들에게는 큰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감염 이후의 삶을 관리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치료가 발전하면서 HIV로 사망하는 경우는 크게 줄었고, 대신 심혈관질환이나 암, 골다공증 같은 만성질환을 함께 관리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금은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감염인은 최소한 HIV 때문에 사망하지 않는다”며 “오래 살면서 생기는 다른 질환들을 함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느 한 개인의 취약성이 국가 방역의 취약성이 될 수 있다”며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결국 HIV를 둘러싼 가장 큰 문제로 ‘사회적 낙인’을 꼽았다. 그는 “질병은 일종의 재난에 가깝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것 아니냐’고 묻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 병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병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HIV 때문에 감염내과에 다닌다고 말해도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며 “환자들이 병원에 오는 것을 조금 더 당당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