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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신발 속 장난감과 마음의 이물감을 털어낸 오후 [D:쇼트 시네마(150)]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2.18 12:39
수정 2026.02.18 12:39

윤가은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고등학생 자경(정연주 분)은 아빠의 불륜녀 집에 들이닥쳐 끝장을 낼 생각이다. 분노를 가득 안고 찾아간 그곳엔 정작 불륜녀 없고, 어린 두 남매 나루(이지우 분)와 기림(송예림 분)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 엄마가 회사에 가 늦을 거라는 아이들의 말에, 자경은 어린 자식을 키우면서 불륜을 저지른 여자의 뻔뻔함에 더욱 기가 막힌다.


낯선 언니의 방문이 싫지 않은 기림과 달리, 오빠 나루는 엄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주스까지 쏟아버리는 자경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뻘쭘해진 자경은 씩씩거리며 집안을 뒤지다 자신이 아빠에게 선물했던 라이터와 불륜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자경은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립스틱으로 뭉개버리지만, 정작 그 립스틱은 그림을 그리던 기림에게 무심히 건넨다.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정작 이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자경도 알기 때문이다.


그때 장난감을 꺼내려다 이마를 다친 기림을 나루가 발로 차며 화를 낸다. 자경은 그 모습을 말리며 기림의 이마에 정성스레 반창고를 붙여준다. 복수의 공간은 어느새 돌봄의 공간으로 변한다.


이때 예상치 못한 아빠의 등장에 자경은 분홍색 컨버스를 집어 들고 급히 몸을 숨긴다. 자경은 아빠가 자신이 선물한 라이터를 소중히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한편, 남매에게 자신을 '아빠'라 칭하며 다정함을 연기하던 아빠가 떠나자, 나루는 참았던 불편함과 화를 터뜨린다.


홀로 남겨진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나루의 일기장 보호자 란에 싸인까지 해주며 시간을 보내던 자경은, 불륜녀가 도착하기 직전 자리를 뜬다. 떠나기 전 자경은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에게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자경이 누구냐고 묻는 기림에게 그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라 가르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발 속을 괴롭히던 작은 장난감 조각을 빼내는 자경. 잔뜩 독이 올랐던 그녀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조금 가벼워져 있다.


이 영화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분노를 잔뜩 품은 소녀가 낯선 집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그 감정이 어떻게 일렁이고 변해가는지를 세밀하게 따라간다. 자경이 들이닥친 집에서 마주한 어린 남매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저 어른들의 무책임이 만들어낸 빈틈을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는 아이들일 뿐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튼다. 누군가를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받은 아이와 아이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 집중한다.


초반 자경의 행동은 거칠고 무례하다. 주스를 쏟고,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립스틱으로 뭉개버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잃는다.


아버지의 등장은 극 중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다. 숨어서 지켜보던 자경은 자신이 선물한 라이터를 소중히 챙기는 아버지의 손짓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완전히 밀어낼 수는 없는 마음이 짧은 순간에 담긴다.


여화 제목 처럼 처음에는 자경이 남의 집에 들이닥친 손님 혹은 침입자처럼 보이지만, 자경과 남매 누구도 이 관계를 선택하지 않았고, 누구도 준비되지 않았다. 자경은 그 낯선 풍경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분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스스로 낯선 사람으로 들어왔던 자경이, 자신 같은 침입자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고 떠나는 모습은 잠시 애틋하기까지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경의 신발에서 툭 떨어진 장난감은 아이들의 세계가 불쑥 끼어든 불편함이었지만, 동시에 자경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만든 매개체로 보인다. 자경은 스스로를 갉아먹던 분노에서 벗어나 자신의 상처를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러닝타임 19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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