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51>] 소설 ‘역전의 용사’
입력 2022.10.26 14:03
수정 2022.10.26 14:03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51화 소설 ‘역전의 용사’
이철백과 한종탁의 공저 ‘역전의 용사’가 출간되었다. 낙엽 떨어진 거리에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어대는 늦가을이었다. 이철백은 조언 정도야 하겠지만 집필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극구 손사래 치는 한종탁을 삼고초려로 끌어들였다. 방선희도 곁에서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이철백은 구성에 도움을 준 한종탁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책을 만드는데 유리하리라고 생각했고, 특히 한종탁이 낸 구상은 본인이 직접 집필해야 완성도가 높아질 것 같았다.
역전의 용사는 모두 2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이철백이 쓴 ‘역전의 용사’로 소설 형식이었고 2부는 한종탁이 쓴 ‘술과 나’로 에피소드류의 에세이 형식이었다. 제1부 역전의 용사는 김석규를 모델로 한, 술을 엄청 탐닉하는 주인공 ‘주경(酒鯨, 술고래)’의 좌충우돌 음주 행각을 그린 코믹소설이다. 지나친 음주로 가정과 직장에서 신의를 상실한 주경은 술 마실 핑계를 찾다가 역시 술꾼인 친구 간디를 멘토로 삼아 음주수행이란 걸 하게 되고 마침내 알코올중독을 넘어 편집망상에 이른다.
주경은 술이 국가와 사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주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날 주경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술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술이란 적을 섬멸하는데 이 한 목숨 다 바치겠노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어이없게도 술을 진탕 마셔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주경은 술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정부 내 모든 부처, 특히 국방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며 전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예비군까지 총동원하여 술을 섬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물불, 아니 주종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취를 불사하고 술 섬멸에 최선을 다한다. 급기야 주경은 술과의 대대적인 교전으로 말미암아 간 질환이 아닌 과호흡증후군이라는 뜻밖의 중상을 입고 정신병원으로 후송된다.
제2부 ‘술과 나’는 저명인사들의 술 관련 에피소드가 에세이 형식으로 소개되는데 첫머리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이슈, 시대를 초월해서 뜨거운 감자인 박정희로부터 시작된다. 박정희가 대단한 술꾼이었고 5.16 쿠데타가 취중 거사였다는 점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의 두주불사도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군 시절 둘이 앉아서 소금을 안주로 해서 4홉들이 소주 두세 병을 마셨으며, 맥주는 기별이 안 와서 미리 PX에서 손바닥만 한 미제 위스키 한 병을 사 뒷주머니에 넣고 가서 맥주 마시기 전에 위스키 원샷한 이야기. ‘발렌타인 17년’을 좋아한 이유는 술을 마시다 보면 17년산인지 30년산인지 구분이 안 가기 때문에 17년산만 마신다는 이야기 등등.
또한 주당으로 소문난 문인들이 뒤이어 등장하는데 이는 영원한 문청인 한종탁의 선호에 따른 구성이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거문고와 시, 그리고 술을 좋아했다. 이규보는 술을 의인화한 가전문학 작품으로 ‘국선생전’을 남겼다. 또한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윤회는 워낙 술을 좋아해서 세종에게 많은 질책을 받았다. 어느 날 세종이 은으로 만든 작은 술잔 하나를 윤회에게 주면서 술을 마시되 석 잔을 넘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러자 윤회는 그걸로 석 잔을 마시긴 했는데 그 술잔을 망치로 두들겨서 사발로 만든 후였다.
술과 관련한 명저로 수주 변영로의 ‘명정(酩酊) 40년’,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동탁 조지훈의 동문서답 등을 드는데, 명정 40년의 수주 변영로는 두주불사인데다 취하면 객기가 대단했나 보았다. 대낮에 공초 오상순, 횡보 염상섭 등과 만취하여 벌거벗은 채 남의 소를 훔쳐 타고 서울 시내로 진출한다는 이야기가 명정 40년의 ‘백주에 소를 타고’란 수필에 가감 없이 나온다. 하지만 수주는 매일같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도 이튿날엔 일찍 거뜬하게 일어났다고 하니 타고난 술꾼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미당 서정주의 동서이자 천재시인으로서 주벽과 기행을 일삼다가 36세로 요절한 김관식 역시 한종탁의 펜을 비껴가지 못했다. 김관식은 4.19 이후 서울 용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장면과 겨루다 낙마하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김관식은 권력을 좇는 선배문인들에겐 안하무인에 반말지거리도 서슴지 않은 기고만장이었지만 박재삼이나 신경림 같은 동료들에겐 정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위인이었다. 또한 김관식은 시청 철거반과 싸우면서도 기어이 세검정 밖 홍은동 야산 국유지에 무허가로 판자촌을 만들어 가난한 문인들을 살게 하는 뚝심과 배려를 발휘하기도 했다.
김관식과 함께 문단의 양대 기인으로 불리는 이가 천상병 시인이다. 천상병이 동백림사건으로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동료문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유고시집을 내주기도 했다. 천상병은 문인들에게 술값 동냥을 해서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의 술값 동냥은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다. 신경림은 가난하니 막걸리 한잔 값, 오영수 선생은 먹고 살만 하니 막걸리 열잔 값은 받아도 되겠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임의로 정해 놓은 금액 이상의 돈을 상대방이 내밀면 도리어 큰소리치면서 나머지 금액을 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철백이 ‘역전의 용사’ 원고를 유수의 출판사에 보내 출간을 타진해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설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곳은 원고 자체가 생뚱맞고 어이없었는지 무응답으로 일관했고 그나마 문학, 인문, 철학, 잡학 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출판사는 ‘자비출판’을 권했다. 방선희가 눈 밝은 출판사를 못 만나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자비출판이면 또 어떠냐고 하면서 흔쾌히 통장 하나를 내놓았다.
이에 이철백이 통장을 들고 직접 출판사를 섭외하러 나서 ‘음주와 비평’이란 곳을 찾아냈다. ‘술, 이렇게 마신다.’라는 술 관련 자기계발서라든지, ‘1개월 만에 술 끊는 비법’ 같은 금주 교본은 물론 ‘인류와 술’이라는 교양서적에 이르기까지 술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전문출판사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철백의 원고를 본 음주와 비평, 즉 음비 사장은 처음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더니 방선희가 자비출판도 불사한다는 의향을 내비치자 돌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방선희는 계약에 대한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인세를 최저로 낮추는 대신 공격적인 마케팅을 주문했고, 음비 사장은 언론계와 출판계에 포진해 있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적극적으로 광고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이 작가님. J신문에서 인터뷰 섭외가 들어왔는데요. 작가님과 소설 주인공을 동시에 인터뷰하고 싶다는 군요.”
눈 구경하기 힘든 따뜻한 남도에서 반가운 첫눈과 함께 온 음비 사장 강용태의 전화였다. ‘역전의 용사’는 출판과 동시에 강용태의 적극적인 홍보로 다수 신문의 신간 안내면에 소개되었다. 이철백이 난감해하는 음성으로 ‘작가 인터뷰만 하면 되지 무슨?’이라며 반문했다. 기자가 김석규까지 인터뷰하겠다고 들이미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이철백은 역전의 용사가 발간되고 한종탁과 함께 시골의 김석규를 찾아갔다가 호되게 핀잔만 들어 무안해했던 게 떠올랐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