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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왕조시대에 사는 사람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2.06.27 08:00
수정 2022.06.27 07:52

이 시대에 공관이 왜 필요한가?

지위 자랑을 그렇게도 하고 싶나

일제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시라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공관. ⓒ데일리안 DB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의 처사가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개탄스럽다. 지난 2일부터 현재소장 공관 주변의 등산로가 폐쇄됐다. 헌재측이 사생활 침해·소음·보안상 문제 등을 이유로 이를 요청한데 따라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출입금지’ 안내문을 내걸었다. 유 소장이 불평하면서 지시하지 않았다면 헌재가 그런 요청을 했을까.


청와대 개방 후 금융연수원 앞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이용했던 사람들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높은 분이 사시는’ 집 인근으로는 다니지 말라는 것 아닌가. “헌재소장 공관이 등산로 입구 쪽에 있고, 헌재가 관리하는 부지인 만큼 문화재청이 일방적으로 개방 결정을 하긴 어렵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은 헌재나 문화재청과 상관없는 종로구청 소유지다.

이 시대에 공관이 왜 필요한가?

문화재청은 “엄밀하게 따지면 등산로라고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했다. 맞는 말이다. 청와대 개방 전엔 청와대 뒷산 등산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이제 청와대와 함께 북악산도 열렸다. 당연히 등산로가 새로 생기게 마련이다. 사유지 침해가 아닌데 왜 막는가.


‘보안’ 핑계도 대는 모양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이 있는지부터 설명해주는 게 순서다. 공개‧개방 요청을 ‘보안’으로 묵살해 버리는 것이야 말로 권위주의 시대 관료들의 상투적인 대응방식이었다. 그렇게 말하려면 용산 대통령 집무실은 보안이 필요 없는 곳인가? 법원까지 나서서 집무실 100m이내의 집회와 행진을 허용하라는 판결을 했다. 헌재소장 공관의 경우는 100m 이내 집회가 법으로 금지되지만 등산은 시위행위가 아니다.


어느 모로 보건 등산로 폐쇄는 월권이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24일 “저도 지난 주말 헌재 소장 공관 쪽으로 해서 한번 걸어봤는데 정말 막혀있더라”며 “안내문에 ‘총리공관 옆으로 가라’고 돼 있다”고 말했다.(헌재소장은 총리보다 국가서열 상위여서?) 권 원내대표는 또 “(공관이) 도로에서 좀 떨어져서 안쪽으로 굉장히 부지가 크다”며 “낮에 사람들이 통행한다고 해서 무슨 소음 피해가 클 것 같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 논리라면 북촌의 관광객이 골목골목 얼마나 다니느냐. 그 골목을 다 폐쇄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헌재소장 공관은 대지 2810㎡(850평), 임야 8522㎡(2578평) 규모다. 공관 건물 규모만 봐도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연면적은 959.07㎡(290.1평)에 달한다. 1·2층은 사무실 및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지하층은 보일러실과 창고 등으로 사용된다. 헌재에 따르면 공관 운영비로는 연 4000만~5000만원이 지출된다”(중앙일보, 6. 24).


유 재판소장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임기 중 공관에 사는 것은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도 당연한 권리다. 국회의장, 대법원장도 광활하다할만한 대지 위에 지어진 고대광실에서 위세를 한껏 떨쳐왔다. 게다가 일부의 경우, 결혼한 자녀까지 불러들여 같이 사는 등 사적 공간으로 오·남용하기도 했다. 유지·보수비용을 지나치게 들였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은 예도 있었다.

지위 자랑을 그렇게도 하고 싶나

예사 지위로 ‘공관’에 거주할 수는 없다. 고관대작이게 마련인데 집이 없어서 공관살이를 탐내겠는가. 공관이라는 것 자체가 신분과시용으로는 그만이다. 특별한 영역을 국가가 정하고 사람을 시켜 관리해준다. 게다가 대개 규모가 으리으리하다. 아마도 예외 없이 접견실 혹은 회의실, 그리고 연회실이라는 이름의 널따란 공간을 몇 개씩 갖추고 있을 것이다. 내·외빈을 접대하고 중대한 회의를 하기 위해 필요한 준(準) 집무실이라는 주장도 하는 모양인데, 집에서도 지위를 과시해야 하겠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태도이겠다.


옛날 왕조시대나 중앙집권 시대엔 지방관들을 위해 공관인지 관사인지가 필요했다고 하겠지만 지금 세상에 그런 게 소용될 까닭이 없다. 더욱이 서울에 집무실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관’은 가당찮은 과잉대우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기관장들에 대한 공관 또는 관사 제공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외빈 접대나 특별한 회의‧모임 등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시내에 널려 있다. 집무공간에서만이 아니라 귀가해서까지 소왕국의 분위기를 누리겠다는 욕심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런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청와대 관저라는 것을 TV화면을 통해 보면서 기함할 뻔 했다. 침실이 80평에 이른다는 설명이었다(자다가 축구할 일도 없을 텐데). 가족실도 있고 접견실‧회의실‧연회실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그 안에도 집무실이 또 있다고 했지, 아마? 옷장이 15개나 된다는 말도 있었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민의힘 지도부와 비공개 오찬 회동을 하면서 청와대 관저를 둘러본 김건희 여사의 소감을 전했다.


“여기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이렇게 좋은 데인 줄 알았다면, 만약 여기 와서 잠시라도 살았다면 청와대를 나가기 굉장히 어려웠겠다.”

누구인들 그런 느낌을 갖지 않겠는가. 허가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살게 되면 자연 세사(世事)와는 담을 쌓게 된다. 그래서 구중궁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5년을 보낸 문 전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청와대 탈출’을 비난한 까닭은 뭐였을까? 실상이 드러날 게 부담스러워서? 윤 대통령이 자신과 차별화될 것이 싫어서?

일제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시라

민주헌정사가 74년여에 이른 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 특히 높은 자리에 있거나 있었던 인사들의 의식은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다. 지위 및 지위과시욕구와 재물욕심이 여전해 보인다. 누린 게 많았던 사람일수록 더하다는 인상을 준다. 문 전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잊힌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추종자 접견과 SNS활동에 여념이 없다는 소식이다.


이왕 사회적 의제로 대두된 문제다. 차제에 고위공직자를 위한 ‘공관’ 제도는 폐지하는 게 옳다. 대통령에게는 특별한 안전·보안 수단이 갖춰진 관저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고 침실만 80평이라는 청와대 관저 같은 건 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른 높은 분들 모두 집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일제히 환택(還宅)할 일이다. 집이 없다면 전세나 월세로 살든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대사성·대제학·우의정 등을 지낸 유관(柳寬)은 청렴·청빈으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비 오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앉아서 우산 없는 집을 걱정했다는 그 사람이다.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살았는데 집이 너무 초라한데다 울타리조차 없었다. 태종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집을 지어주는 게 어떨까”라고 물었다. 유관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울타리라도 둘러쳐주는 건 어떻겠는가?”

“그것 역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기에는 과인이 너무 불안하도다.”


왕은 선공감(繕工監: 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명을 내려 밤중에 울타리를 쳐주게 했다. 알면 사양할 것이니 모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유관은 겨울에도 손님이 찾아오면 맨발로 신을 끌고 나가기가 일쑤였고, 몸소 뒤뜰에 있는 채전을 가꾸었다(靑坡劇談, 박용구, 한국기담일화집 재인용).


말을 하다보니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문 전 대통령의 양산 자택 경호 인력이 65명인가 된다고 한다. 경호시설 마련에 22억원, 경호용 조경수목 울타리 조성에도 3억3500만원이 들었다. 이 속에 살면서 상왕 노릇할 마음이 안 생긴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


우리의 의식이 정말로 왕조시대에서 벗어났는지 늘 그게 궁금하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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