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㉓] 남주혁의 셀프AS ‘건드리지 마시오’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3.10 14:51
수정 2022.03.10 14:51

배우 남주혁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홈페이지 내 '현장포토'

지난 2020년 9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


원어민교사 매켄지(유태오 분)가 ‘욕조 안은 건들이지 말아주세요’라고 적어 놓은 메모. 이를 본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 분)은 ‘욕조 안은 건들이지 마라주세요’라고 고쳐 적는다.


사실 틀린 건 ‘건들이지’이고 이를 ‘건드리지’라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엉뚱하게 ‘말아’를 고쳐 ‘마라’로 적은 것이다. 이 장면은 재기발랄한 이경미 감독의 장난기를 그대로 닮은 안은영의 엉뚱 발랄 캐릭터를 드러냄과 동시에, 기성 드라마와는 한참 다른 ‘보건교사 안은영’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확인시킨다.


배우 정유미의 귀여운 표정까지 더해진 이 감독의 연출에 까르르 대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블로그를 통해 이경미 감독이 ‘마라주세요’뿐 아니라 ‘욕조 안은’에 ‘영’을 덧붙여 ‘욕조 안은영’으로 적으려 했으나 스태프가 말렸다는 내용을 보고 한 번 더 웃었다.


천재형 개구쟁이 이경미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별다른 언급 없이 ‘건들이지 마라주세요’로 고쳐지면서, 이것이 올바른 표기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을 더러 보았다. 사실 ‘건드리지’와 ‘건들이지’보다 ‘말아’와 ‘마라’가 더 헷갈린다. ‘건들이다’라는 단어는 아예 없지만, ‘말다’의 활용은 다르다. ‘먹지 마라’ ‘먹지 마세요’라고 적을 때는 ‘ㄹ 탈락’이 되어 ‘마’가 되기 때문에 ‘마라주세요’가 어쩐지 눈에 익은 착각을 준다.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출처=네이버 블로그 enmi1223z

띄어쓰기까지 고려하자면 정확한 표기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이다.


‘알려 주다’와 같이 ‘알리다’ 본용언에 ‘주다’을 보조용언이 붙을 때는, ‘알려 주다’가 원칙이나 ‘알려주다’로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되고 있다. 또 본용언에 두 개의 보조용언이 이어질 때도(본용언+보조용언+보조용언), 본용언과 앞 보조용언은 붙여 쓸 수 있고, 뒤 보조용언은 띄어 쓴다. 이것을 ‘건드리다’ 본용언에 ‘말다’와 ‘주다’라는 보조용언이 연이은 사례에 적용하면 ‘건드리지말아 주세요’가 되는데, 이 경우엔 안 된다. 왜냐하면 ‘~지 말다’ 구성일 때는 앞 보조용언(말다)을 본용언(건드리지)에 붙이는 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가 올바른 표기다.


1년 반 전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기사를 쓰다가 접었다.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는 어구가 생각나서다. 재치 넘치는 독특한 감각의 코미디 ‘보건교사 안은영’을 사례로 표기 얘기를 하는 게 과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 어느 표기가 맞는지 궁금증을 표하기도 하고 질문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아, 썼어야 했나’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왔다. 그것도 운명처럼,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한문 선생 홍인표를 연기했던 배우 남주혁의 신작이 용기를 주었다.


건드리지 마시오 ⓒ출처=네이버 블로그 browniris7

바로, 2022년 2월 방송을 시작한 김태리-남주혁 주연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4회의 한 장면.


백이진(남주혁 분)은 입사 면접에 떨어져 낙담했고 세 들어 사는 대문 앞에서 잠들었다. 이를 발견했지만 해 줄 게 없는 나희도(김태리 분)는 백이진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그 위에 ‘오늘 면접 떨어짐 건들이지 마시오’라고 적은 A4 용지를 올려놓았다. 걱정이고 배려였지만, 온 동네 사람들에게 백이진의 면접 낙방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결과를 낳고, 그렇게 또 웃음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의 명장면이 탄생했다.


백이진은 나희도의 오기 ‘건들이지’에 4회가 끝나기 전에 말한다. “언제 사과할 거야? 너 그리고 ‘건들이지’가 아니라 ‘건드리지’거든”. 정지현 감독과 권도은 작가는 한 번 더 쐐기를 박는다. 8회에서다.


씩씩 코미디에서 달콤 멜로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홈페이지 내 '현장포토'

그사이 고졸로서는 처음으로 UBS 방송국 기자가 된 이진, 펜싱 국가대표가 되어 경주아시안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땄지만 판정 시비에 휘말려 ‘금메달 도둑’이 되어 징계 처분을 받고 터덜터덜 귀가하던 희도가 버스에서 만난다.


이 장면에서 이진은 “야, 근데 진짜 신기하다. 나 너 생각하고 있었는데”라고 말하며 이제 막 이진을 좋아하기 시작한, 그런 자기 마음도 모르는 희도를 설레게 한 뒤. 읽고 있던 신물을 펴서 ‘PC통신에 중독된 청소년들, 맞춤법 파괴 심각’이라는 한 면의 톱기사 제목을 희도에게 보여준다. 약이 오른 희도는 이진에게 주먹을 뻗지만, 이진은 희도의 주먹을 감싸 막은 뒤 천천히 말한다. “건 들 이 지 마 시 오”. 마치 주먹으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 같지만, 희도의 맞춤법 실수를 다시금 놀리는 장난이다.


마치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문 선생님이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기자가 되어 맞춤법을 바로잡는 느낌을 안긴 ‘건드리지 마시오’ 관련 장면들. 희도와 이진의 사랑이 커가는 장면들에 활용돼 달콤함도 더하고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