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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㉑] 그러니 포기를 욕하지 말자(아직 최선)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2.24 08:17
수정 2022.02.25 00:05

배우 박해준 ⓒ방송 화면 갈무리

드라마 뭐 볼까? 선택의 고심이 깊어가던 차, 갑자기 재미있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행복한 요즘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서른, 아홉’ 그리고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수요일에서 일요일이 흐뭇하다.


그 가운데 금요일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연출 임태우, 극본 박희권·박은영, 이하 ‘아직 최선’)의 날이다.


성공 한번 못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포기 한 번 안 해 본 사람 있던가. 가히 배우 박해준의 원맨쇼라 할 ‘아직 최선’은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와 코로나19로 어깨가 움츠러든 많은 이에게 “괜찮다”고 등 두드리며 공감 지수를 높이고 있다.


보쌈 하나에 행복할 만큼 눌려 있었던 사회생활 ⓒ메인 예고편 갈무리

사춘기의 11배는 센 ‘44춘기’에 들어선 남금필, 사장 하나에 직원 넷인 작은 의료기업체 영업사원이다. 직책은 과장, 서열상 사장 다음 넘버2지만 아무도 그렇게 대우해 주는 사람은 없다. 영업 나간 병원에선 찬밥 덩이, 직장에선 천덕꾸러기, 집에선 철없는 아버지이자 더부살이 아들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10년을 잘도 다녔다. 월급은 받아야 하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한대와 무시를 참을수록 좁아지는 어깨, 떨어지는 자존감. 어느 날 화가 엉뚱한 데로 폭발했으니 점심 메뉴다. 보쌈 한 번 먹겠다고, 그것도 제대로 장인의 손길 느껴지게 삶아진 고기에 생굴 척척 올려 먹겠다고 버스까지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이보다 맛있게 먹을 수는 없다! 보는 이의 입안에 군침이 고이게 맛있게 먹은 행복도 잠시, 늦은 귀사에 대해 시말서를 쓰라는 사장(남문철 분)의 지시에 사직서를 내미는 남경필!


멋짐은 잠깐이고 현실은 영원한 법. 밀린 잠을 자는 것도 한두 번이고 죽마고우 임인찬(이승준 분)에게 술을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다. 놀이터에서 빈둥대는 모습을 동대표(박지영 분)와 그를 따르는 주민들이 곱게 볼 것도 아니고 아버지 남동진(김갑수 분)의 눈에도 동네 망신살 뻗칠 일일 뿐이다.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친구 ⓒ이하 티빙 제공

남금필은 비어 가는 주머니보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 힘들다. 보쌈이 아니라 다른 음식이 먹고 싶었다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아니다 어차피 언제고 터질 일이었다, 자신을 위로하지만, 위안이 되지 않는다. 후회와 불안은 없다며 잠자리에 들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폭로하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신을 만나는 악몽뿐이다.


돈과 시간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것은 꿈이다. 돈을 좇으면 시간의 자유가 줄고, 시간을 누리면 돈이 아쉬워진다. 남금필은 시간을 택한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느 날 공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백수인 줄 알고 ‘쌍쌍바’의 한쪽을 나눔의 마음으로 건넸던 이(김풍 분)가 빨간 스포츠카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겁한 남금필은 직업을 묻는다. 웹툰 작가! 출근 안 해도 되는데 멋지게 살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이 잘했던 일, 성적표를 온통 ‘양’ ‘가’로 채울 때 유일하게 ‘미’를 맞았던 과목 미술! 자신이 좋아하는 일, 만화 보기!


이제까진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지금부터는 열정으로 도전! ⓒ

남금필은 퇴사 후 처음으로 방 청소도 하고 나름엔 기초부터 작화 공부도 하지만, 웹툰을 그리자나 장비가 필요하다. 새것은 엄두도 못 내고 중고 태블릿을 검색하던 금필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나이와 같은 44만 원짜리를 ‘찜’한다. 나는 왜 돈이 없는가, 친구 인찬에게도 거절당한 금필은 염치없게도 딸 상아(박정연 분)로부터 19만 원을 꿔서 태블릿을 사러 간다. 어렵사리 찾아간 시골 농가에서 넉넉한 인심의 모자로부터 오랜만에 사람 대접받은 금필의 마음이 활짝 웃는다. 읍내까지 얻어 탄 경운기 짐칸에 앉아 금필은 생각한다.


“도전이라는 놈이 잘난 게 아니다. 도전이라는 놈은 포기의 희생으로 존재하는 거다. 그러니 포기를 욕하지 말자. 우리 함께 행복해지는 거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만 박수받을 일이 아니고, 먼저 생업 포기라는 희생이 있었기에 웹툰 작가 도전도 가능했던 것이니 자진 퇴사를 비난하지 말라는 논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기막히게 말이 되는 명언이다. 결코 금필의 아전인수격 해석도 아니고 뻔뻔한 자기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두운 골목 딸 상아와의 귀갓길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친구 같은 부녀 , 서로를 믿어 주는 관계 ⓒ

금필: 상아, 공중그네 알지? 서커스 같은 데서 이렇게 쉬~익. 그게 말이야, 저 앞에 있는 다음 그네를 잡기 위해서는 정확한 순간에 자기가 잡고 있는 그네를 놔야 한대. 그렇잖아, 딱 놓고~ 쉬익~ 딱 잡고. 그러니까 잡았던 그네를 놓고 다음 그네를 잡기 전에, 잠깐 그 공중에 머물러 있는 그 짧은 찰나. 그 찰나 있지. 아빠는 지금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지.


상아: 걱정 안 해.


금필: 역시, 우리 딸은 아빠를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지금의 그네를 놓아야 다음 그네를 잡을 수 있다, 지금 잡고 있는 것을 포기해야 다음을 향해 도전할 수 있다. 같은 뜻이 1화와 2화에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되니 귀에 더 쏙쏙 들어온다. 간만에 열정 가득한 모습에 스스로 들뜨는 남금필이 귀엽고도 멋져 보이는 건 잡고 있던 그네를 놓은 용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발사, 107동 대표, 경비 아저씨(오른쪽부터 배우 김갑수, 박지영, 정규수) 평범한 우리가 주인공인 드라마 ⓒ

지금 당신은, 우리는, 현재의 그네를 꼭 붙든 채 다음 그네를 잡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간 떨어진다. 그네에서 그네로 계속 이어가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혹시 지금 아무것도 손에 쥔 그네가 없어 불안한 당신,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 드라마가 응원한다. 이번 그네를 놓고 다음 그네를 쥐기 전, 공중에 머물러 있는 순간일 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겸덕 스님이나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김희애 분)와 이다경(한소희 분)에게 휘둘리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말하던 이태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낯설고, 영화 ‘4등’이나 ‘힘을 내요 미스터 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교집합도 있을 법한 남금필. 이틀 뒤에는 만날 수 있다.


볼이 터져라, 보쌈 먹는 장면 하나로도 충분한 배우 박해준의 사실적이고도 태연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만이 ‘아직 최선’의 미덕은 아니다. 김갑수, 박지영, 박정연, 정규수, 이승준, 김도완, 강현욱, 이상진, 신수정 등 크고 작은 배역의 배우들이 펼치는 촘촘한 연기가 드라마의 구멍을 허락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 열정을 불태운, 살이 쪽 빠진 모습마저 배우답게 새로운 이미지로 소화한, 이제는 고인이 되신 남문철 배우의 연기가 담겼다는 점에서도 귀한 작품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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