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타려고 모았는데 왜 설렁탕을 사라고 하세요? [기자수첩-산업IT]
입력 2024.11.14 07:00
수정 2024.11.14 12:23
마일리지로 영화보고 생수 사라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합병 앞두고 ‘빚’ 줄여야
보너스 항공권 못 구하면 생수라도?… 설득력 필요해
"미국 갈 때 비즈니스 한번 타보려고 열심히 대한항공 타왔는데… 정작 쓸 곳이 없네요."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열심히 모아온 A씨는 수년 째 같은 고민에 빠졌다. 장거리 비행에서 퍼스트, 비즈니스 좌석에 한번 앉아보기 위해 대한항공을 줄곧 이용해왔지만, 여전히 '쓸 곳'을 찾지 못해서다. 대한항공이 최근 마일리지 사용처를 대폭 늘렸지만, 이 소식에는 관심조차 없다.
대한항공은 최근 마일리지를 다양한 분야에 사용 가능하도록 제휴를 대폭 넓혔다.기존엔 굿즈 등 제한적이었던 사용처를 생수부터 설렁탕, 영화 티켓까지 살 수 있도록 손을 썼다. 대외적인 취지는 '고객 편의 확대'지만, 속내는 '갖고있는 마일리지를 쓰라'는 것이다.
대한항공이 갑자기 '마일리지 털어내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일리지는 항공사 입장에선 '빚'으로 환산된다. 사용하지 않은 마일리지가 쌓이면 쌓일 수록 부채가 늘어나는 셈이다.
대한항공의 갑작스런 마일리지 소진 장려 움직임에 업계에서는 아시아나항공과의 통합이 가까워졌다는 말들이 나온다. 합병 작업에 착수하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 중 하나가 '마일리지 통합'이기 때문이다. 양 사에 쌓인 마일리지를 최대한 털어내지 않으면 합병 과정에서 부채 부담이 확대될 수 밖에 없다. 대한항공은 약 4년간 각국의 합병 심사를 거친 가운데 이제 미국 한 곳의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다.
합병 후 재무상태를 걱정해야하는 대한항공의 속내가 이해는 되지만, 문제는 마일리지 소진의 방식이다. 똑같이 대한항공을 타고 쌓은 마일리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는데, '공평한 선택권'이 주어지지는 않고 있어서다. 마일리지 소진 만이 주목적이라면, 생수도 좋지만 고객들이 정말 원하는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도 공평히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비행거리가 가장 긴 축에 속하는 미국까지 편도로 대한항공을 이용했을때 쌓이는 마일리지는 약 6500 마일리지 정도다. 500ml 생수 30병을 구매하려면 2500 마일이 더 필요하다. 미국을 왕복해서 다녀와야만 구매 가능하다. 같은 상품을 시중에서 구매하면 30병에 2만5500원인데, 6500마일을 항공권으로 바꾸면 제주도까지 무료로 갈 수 있다.어떻게 환산하더라도 항공권보다 마일리지 몰에서 사용하는 것이 손해다.
생수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마일리지로 바로 구매가 가능하지만, 정작 마일리지를 모으는 이들이 원하는 보너스 항공권은 생수처럼 쉽게 얻을 수 없다. 마일리지로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하기 위해선 일년 전에 예약해도 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마일리지를 쓸 수 있지만, 진짜 원하는 곳에 쓰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뜻이다.
생수 30병과 보너스항공권을 '같은 사용처'로 치부하는 것은 초등학생이 봐도 속이 뻔히 보이는 꼼수다. 마일리지를 적극적으로 소진하게 하고 싶다면, 필요도 없는 프리미엄 생수나 영화 티켓을 억지로 안기기보다는 소비자들이 진짜 원하는 보너스 항공권 좌석을 한시적으로라도 늘리는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
마일리지 사용은 소비자들에게는 '가장 예민한' 문제다. 특히 대한항공은 작년 초 마일리지 개편안을 내놨다가 정부와 소비자들로부터 흠씬 두들겨맞고 물러선 전적도 있다. 그때 역시 장거리 노선 항공권과 좌석 승급에 필요한 마일리지를 기존 대비 크게 늘리는 내용을 내놓은 것이 문제가 됐는데, 소비자들이 가장 원하는 건 장거리 노선 항공권에서의 마일리지 사용이라는 것이 증명된 사례가 됐다.
합병이 가까워진 가운데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선 지금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기다. 막상 모든 국가의 승인을 받아 통합 작업이 시작되고, 이때부터 소비자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은 늦다. '초대형 국적 항공사의 탄생은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여론이 형성돼야 합병 작업에서의 잡음도 줄일 수 있다.
이미 양사 합병을 두고 소비자들 사이 거론되는 '서비스 독점', '항공권 가격 상승'에 대한 수많은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적어도 소비자들에게 퍼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비싼 돈 주고 마일리지를 쌓기 위해 충성을 다해 이용했더니, 정작 그 대가가 생수 몇 병이라면 자국에 탄생한 초대형 항공사를 반겨야할 의무는 없어질 것이다.
당장의 빚을 털어내고 재무구조를 안정시키는 것은 기업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시아나 인수의 명분으로 국민에 대한 서비스 확대와 국적 항공사의 경쟁력을 내세웠다면, 그에 걸맞은 정책으로 국민을 납득시킬 의무 역시 가볍게 해석해선 안된다. '초대형 항공사'라는 수식어는 비단 규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