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입 소수인종 우대정책 위헌" 판결 …62년 만에 역사 속으로

김상도 기자 (marine9442@dailian.co.kr)
입력 2023.06.30 16:57 수정 2023.06.30 16:58

대법 "인종이 아니라 경험에 따라 대우해야"…기존 판결 뒤집어

흑인·히스패닉계 타격클듯…한국 등 아시아계 영향 전망 엇갈려

척 슈머 "인종 정의에 큰 장애물"…트럼프 "능력기반 제도 복귀"

위헌 판결, 인종 간 갈등 격화 우려 제기…'제2낙태권' 논란되나



미국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대입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진은 워싱턴DC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전경. ⓒ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62년간 대학입학에서 흑인·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을 우대해온 정책인 이른바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대입정책뿐 아니라 취업 등 미국 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큰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CNN방송 등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은 29일(현지시간)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A)이 “소수인종 우대입학 제도가 백인과 아시아계 지원자에 대한 차별”이라며 노스캐롤라이나대와 하버드대를 상대로 각각 낸 헌법소원을 6대 3, 6대 2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대학이고 하버드대는 가장 오래된 사립대학이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날 판결문을 통해 “학생은 인종이 아닌 개인으로서 경험을 바탕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너무 오랫동안 대학들이 개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불굴의 도전, 축적된 기술, 학습 등이 아니라 피부색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려 왔다”며 “우리 헌정사는 그런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보수 성향의 흑인 남성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보충 의견에서 “개인은 각자의 고유한 경험, 도전, 성취의 총합”이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이 아니라 어떻게 이에 맞설지에 대한 그들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고 소수인종 우대정책의 수혜자이지만 정책을 폐기하는 다수 의견 쪽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소수 의견을 낸 진보적 성향의 첫 히스패닉계 여성 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평등한 교육 기회는 미국에서 인종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며 “이번 판결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선례와 중대한 진전을 후퇴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A)의 활동가들이 2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대법원에서 "반(反) 아시아계 차별을 철폐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 EPA/연합뉴스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인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과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 도 반대의견에 동참했다. 다만 잭슨 대법관은 하버드대 이사 근무 경력 때문에 하버드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 사건 판결에는 불참했다.


앞서 2014년 SFA는 대학 신입생을 뽑을 때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을 적용해 백인과 아시아계 지원자를 차별했다면서 노스캐롤라이나대와 하버드대를 상대로 각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서는 SFA 패소 판결이 나왔다. 대학이 인종별로 정원을 할당하거나 수학 공식에 따라 인종 분포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인종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한 기존 대법원 판례를 들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특히 이번 판결은 1978년 이후 40년 이상 유지돼 온 판례를 뒤집은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 것으로 예상된다. NYT는 이날 “대학입시 제도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게 돼 앞으로 큰 혼란이 일 것”이라며 “소수자들의 사회참여 기회를 제한하고, 고용 시장에서 인종적 다양성을 제한하는 등 광범위한 파장이 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더욱이 소수인종 우대정책의 주요 수혜자로 꼽힌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캘리포니아주가 이 정책을 금지한 뒤 일부 학교의 경우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의 입학 50% 가량 줄었다고 ABC방송은 보도한 바 있다.


미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극우에 가까웠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대법원이 ‘보수 우위’ 구도로 재편된 데 따른 결과”라고 평가했다. 위헌 결정에 찬성한 대법관 6명 중 3명은 직전 트럼프 행정부 때 임명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위헌 판결이 나올 수 있는 정치적·사법적 환경을 만든 셈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29일(현지시간) 워싱턴DC 소재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행정부도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백악관은 “대법원 판단을 검토하겠다”는 입장만 밝혔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 의원(뉴욕)은 "대법원 결정은 우리나라가 인종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데 거대한 장애물을 놓은 것"이라며 "잘못된 결정은 우리가 모든 미국인이 평등하게 대우받도록 하려면 갈 길이 얼마나 먼지를 일깨운다"고 유감을 표했다.


반면 공화당 소속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미국을 위해 훌륭한 날"이라며 "우리는 완전히 능력에 기반을 둔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게 옳은 길"이라고 밝혔다. 역시 공화당 소속인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학생들이 한층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됐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외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나라인 만큼 위헌 판결에 따른 국제적 파장도 예상된다. 한국 등 아시아계의 영향과 관련해서는 여론이 다소 엇갈린다.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가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8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계의 경우 응답자의 50%가 ‘어퍼머티브 액션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했지만, 대입 때 인종을 고려하는 것에 대해서는 72%가 반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에서 아시아계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답변 양상을 보였다. 이는 학업성적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아시아계 학생들이 소수인종 우대정책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판결이 미국 내에선 인종 간 갈등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해 6월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 판결 이후 미국 내 진보-보수 진영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처럼 2024년 대선의 주요 변수로 떠오를 수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전경. ⓒ AFP/연합뉴스

일각에서는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가 여성 유권자의 거센 반발을 초래해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에 이바지한 것처럼 소수인종 우대입학 폐지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를 결집해 '제2의 로 대 웨이드'가 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용어설명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은 미국의 소수자 우대정책을 통칭한다. 대학 입학이나 공공기관 채용 때 흑인·히스패닉이나 여성 등 소수자에 혜택을 주는 조치로, '적극적 우대조치' 또는 '긍정적 차별'이라고도 한다.


이 정책은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던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시행됐다. '정부기관들은 지원자의 인종, 신념, 피부색, 출신 국가와 무관하게 고용되도록 적극적·긍정적(affirmative)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후임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5년 ‘연방정부가 직원 고용 시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에 차별받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는 강화된 내용을 담아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힘입어 고용 차별금지 조치가 실시됐고, 대학에서는 소수인종 우대입학 정책이 도입됐다.


하지만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이 주로 혜택을 받으면서 성적이 우수한 ‘백인과 아시아계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이에 따라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미시간·플로리다·워싱턴·애리조나·네브래스카·오클라호마·뉴햄프셔· 아이다호 등 9개 주는 공립대에서 인종에 따른 입학 우대정책을 금지한 상태다.

김상도 기자 (sara0873@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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