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단절' 강조했던 박지원의 '정치개입'
입력 2021.08.04 03:50
수정 2021.08.03 23:51
"국정원, 김여정 하명기관 전락"
'완벽한 정치단절'을 강조했던 박지원 국정원장이 개인 의견을 전제로 한미연합훈련 취소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요구한 훈련 취소를 사실상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평소 박 원장이 국정원 역할을 정보 분야에 국한시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정책 제안'은 정치 개입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 간사인 하태경 의원은 3일 국정원 보고를 받은 직후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이 사실상 김여정의 하명기관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하 의원은 이날 국정원 보고의 주된 메시지가 김 부부장의 연합훈련 중단 요구에 대한 박 원장의 입장 표명이었다며 "김여정 요구에 대해 국정원(박 원장)이 입장을 밝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비공개를 요청했지만, 박 원장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앞서 김 부부장은 지난 1일 발표한 담화에서 "남조선 측이 8월에 또다시 적대적인 전쟁연습을 벌려놓는가 아니면 큰 용단을 내리는가에 대해 예의주시해 볼 것"이라며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은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정보위 여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박 원장이 개인 의견을 전제로 북한이 연합훈련과 관련한 한미 협의 및 우리 정부 대응을 예의주시하며 다음 행보를 결정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밝혔다.
박 원장은 김 부부장 담화와 관련해선 올해 초 제8차 노동당대회에서 '근본 문제'로 규정한 바 있는 연합훈련에 대한 선제적 결단을 거듭 촉구하는 차원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그는 한미가 연합훈련을 취소할 경우 북측이 남북관계에 대한 상응조치, 즉 유화정책를 펼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의원에 따르면, 박 원장은 "6·15 정상회담을 위한 접촉 당시부터 지난 20여 년간 미국은 북한 인권문제를, 북한은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해왔다"며 "연합훈련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만,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고 북한 비핵화의 큰 그림을 위해서는 연합훈련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태경 "이인영과 北 비위 맞추기 경쟁하나"
야당은 정보수장이 개인 의견을 전제로 정책을 제안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하태경 의원은 박 원장이 취임 이후 "'국정원은 '정보 부서'이지 '정책 부서'가 아니다'는 말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며 "통일부가 (훈련 취소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굳이 국정원이 또 (입장을) 낸 것은 이인영 장관과 '북한 비위 맞추기 경쟁'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박 원장은 지난달 말 국정원 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완벽한 정치단절에 대한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강조한 바 있다.
하 의원은 "김여정 요청에 국정원이 즉각 입장을 밝혀야 될 정도로 '박지원 국정원'은 우리 국정원 위상을 추락시켰다"며 "더 이상 우리 국정원이 망가져서는 안 된다. 박지원 원장이 항상 강조해왔듯 정보에만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정원(박 원장)이 김여정 담화와 관련해 입장을 밝힌 데 대해 철회하고, 국민에게 사과해줄 것을 공식 요청한다"고 부연했다.
한편 김병기 의원은 국정원장 개인 의견과 국정원 공식 입장이 분리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묻지 말고 판단해달라"며 발을 뺐다.
그는 "하태경 의원과 다른 의원들이 여러 번 말했는데, (박 원장이) 본인 의견을 계속 말했다"고도 했다.
정보 기관장의 정세 논평 및 정책 제안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야당 의원들이 거듭 지적했지만, 박 원장이 개의치 않고 의견을 표명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