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만 키우는 부동산 정책에 은행 전세대출까지 '불똥'
입력 2020.08.17 06:00
수정 2020.08.15 07:23
5대銀 잔액 올해 들어서만 13조 넘게 급증…100조 육박
패닉바잉 속 치솟은 전셋값 역풍…임대차 3법에 또 꿈틀
국내 5대 은행들에서 나간 전세자금대출이 올해 들어서만 10조원 넘게 불어나며 100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을 잡겠다며 잇따라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부작용만 불거지며 전셋값이 치솟자 관련 대출도 빠르게 몸집을 키우는 모습이다. 여기에 최근 국회를 통과한 임대차 3법이 또 다시 전세 시장을 뒤흔드는 새로운 악재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이를 바라보는 은행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달 말 기준 신한·KB국민·우리·하나·NH농협은행 등 5개 은행들이 보유한 전세대출 잔액은 총 94조7296억원으로 지난해 말(81조3058억원)보다 16.5%(13조4238억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은행별로 보면 우선 신한은행의 전세대출이 같은 기간 19조3921억원에서 22조7201억원으로 17.2%(3조3280억원) 증가하며 20조원을 돌파했다. 이어 국민은행 역시 16조2486억원에서 19조3012억원으로, 농협은행은 15조5656억원에서 19조1823억원으로 각각 18.8%(3조526억원)와 23.2%(3조6167억원)씩 전세대출이 늘었다. 또 하나은행의 전세대출 역시 14조4883억원에서 17조9560억원으로 23.9%(3조4677억원) 증가했다. 우리은행만 15조6112억원에서 15조5700억원으로 전세대출이 다소(0.3%·412억원) 감소했다.
이처럼 은행 전세대출이 확대되고 있는 건 그 만큼 전셋값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를 얻는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보니 대출 규모도 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전국 전셋값은 역대 최고 수준까지 오른 상황이다. 국민은행이 집계한 올해 7월 전국 주택 전세가격 지수는 100.898을 기록했다. 이는 2019년 1월 가격 수준을 100으로 두고 최근의 전셋값을 비교해 표시한 것으로, 지난 달 수치는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86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값이다.
아울러 근래에 거래된 서울 아파트 전세의 절반 가까이는 4억원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터넷 부동산정보업체인 직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거래된 서울 아파트 전세에서 보증금이 4억원 이상인 비중은 47.3%에 달했다. 10년 전인 2011년에는 4억원 이하인 아파트 전세가 89.7%에 달했지만 2016년 64.1%, 2018년 53.6% 등으로 매년 비중이 빠르게 줄고 있다.
이렇게 전셋값이 고공행진을 벌이는 배경에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가 집값을 안정화 하겠다는 목적으로 연일 규제 강화를 예고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를 얻기 어려워 질 수 있다는 불안 심리에 패닉바잉이 확산되면서 도리어 전셋값이 부풀어 오르는 흐름이다.
최근 이런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는 6·17 부동산 대책이다. 당시 정부는 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수하는 갭투자를 제한하기 위해 투기과열지구 등 규제 지역에서 시세 3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사면 기존 전세대출을 갚도록 했다. 또 시세 9억원이 넘는 주택 보유자에겐 전세대출 보증을 제한했다. 그러자 올해 4월(0.28%)과 5월(0.22%)에 다소 상승률이 둔화했던 수도권 아파트 전셋값은 6월(0.53%)을 기점으로 다시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 와중 임대차 3법이 이번 달 국회 문턱을 넘으면서, 정책 취지와 달리 전셋값이 더 오르는 역효과가 한층 커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임대차 3법으로 도입된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상한제로 전세 계약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고 계약갱신 시 보증금 인상률이 5%로 묶이면서다. 이에 집주인들이 신규 계약 시 보증금을 최대한 올려 받으려 하면서 전셋값이 더 뛸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 같은 염려는 곧바로 시장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지난 달부터 임대차 3법 통과가 확실시 된다는 전망이 퍼진 가운데 이번 달 3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은 0.17%를 나타냈다. 이는 지난주(0.14%)보다 높아진 상승폭이다. 주간 기준으로 보면 지난해 12월 30일(0.19%) 조사 이후 7개월여 만에 최대 상승이다.
이 때문에 당분간 은행 전세대출 수요도 추가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해지고 있다. 문제는 장기화하고 있는 경기 침체 속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하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가계의 자금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들로서는 장기적으로 전세대출을 둘러싼 건전성 악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국내 가계의 생활형편전망 소비자동향지수(CSI)는 지난달 87에 머물렀다. 이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지난 3월(83)과 4월(79) 등에 비해서는 나아진 것이지만, 올해를 제외하면 여전히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80) 이후 최저치다. CSI는 소비자들이 경기를 어떻게 체감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이 수치가 100을 밑돌면 장기평균보다 소비자심리가 부정적임을 의미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통상 전세자금 대출은 비교적 위험이 적은 여신으로 여겨져 왔지만, 코로나 19를 계기로 더 이상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부정적 평가가 확대되고 있다"며 "그렇다고 당장 여신 심사를 강화할 경우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생계형 대출이라는 측면에서 은행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